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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May 02. 2018

#4. 사랑받을 자격




1.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무언가를 살 때, 우리는 부담을 느낀다.

하물며 내 인생을 걸고 그 혹은 그녀를 가지겠다고 결심하는 바로 그 순간의 부담감이야 더 말할 필요 없다.



2.

운명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백하건대, 수시로 흔들렸다.

가장 먼저 불어온 바람은 ‘의구심’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 친구가 나에게 왔지?’ 끊임없이 되물었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판단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내가 그녀의 선택을 받을 만한 놈인지에 대한, 스스로를 믿지 못해 떠오르는 물음표 수십 개. 그럼에도 그녀가 나를 선택했기에, 나는 결국 수백 년 전에 살았을 또 다른 나를 향해 달음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전생의 업보로 대충 얼버무렸더니 또 하나의 태풍이 찾아들었다. ‘죄책감’이었다. 송곳처럼 뾰족한 그 감정은 잔인하게도 겉모습에서부터 나를 파고들었다. 첫 번째, 나이. 나는 서른셋이었고, 그녀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여섯 살 차이는 애써 제쳐 두더라도, 이십 대 중후반과 삼십 대 초중반 사이에는 실제 나이 그 이상의 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 갭은 양심으로 변해 나를 쿡쿡 찔렀고, 유약한 나는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외모. 나는 그나마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긴 한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반면 그녀는 영화 「범죄도시」를 보러 입장할 때 검표 직원이 “중학생 아니세요?”라고 물었을 정도로 동안인데다가,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낯부끄럽지만, 미모 또한 뛰어나다(이는 객관적 사실로, 그간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수없이 들은 말이다.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뱉는 한 마디, “여자 친구 분이 정말 예쁘시네요!”). 

그리고 세 번째, 자기 확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의 연장선상이었다.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그녀로 하여금 나를 믿도록, 짧은 세 치 혀를 놀려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3.

그런데 들소 떼처럼 무지막지하게 짓쳐들어오는 부담감과 의구심, 죄책감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어 준 이 또한 그녀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4.

처음에는 나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그녀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복하면서도 행복해하기를 거부했다. 대비하지 않으면 그녀의 착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수많은 파편에 온몸이 뚫려 피를 철철 쏟고 스러질 것이었다. 

부담감과 의구심과 죄책감은 행복한 나와 행복하기를 거부하는 내가 치열하게 부딪치며 내뿜는 불똥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녀와 만난 지 세 달이 지날 무렵, 그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자기 불신의 숲은 심장을 완벽하게 잠식했다.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가슴 한가운데가 쿡쿡 쑤셨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수시로 악몽을 꿨다. 그런데 그 말, 그 한마디가 날 살렸다. 

“그냥.” 

술 한 잔 걸친 김에 용기 내어 물었다. 나를 왜 사랑하느냐고. 이것이 그녀의 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 오빠니까 사랑하는 거지.” 그 순간 명치께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쑤욱,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그래서 도리어 그 공간감이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분명 알코올이 혈류량을 증가시켰을 터인데, 명백한 과학적 사실과는 정반대로, 내 심장은 차분해졌다. 이 사람은 나에게서 무언가가 잘려 나가더라도 ‘그냥’ 나를 사랑하겠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에 한순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졸음이 몰려들었다. 

그때 내 몸을 지배한 것은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5.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다.

언제 행복이 사라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행을 온전히 덮을 수 있는 것 또한 행복이다.

고로 우리는 필시 불행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



6.

그녀의 사랑에 싸여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가 나를 사랑할 만한 구석이 내 안에서 하나둘 샘솟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쓴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로 먹고산다. 키가 제법 크다. 온갖 고난을 뚫고 지금껏 버텨 왔다. 잘 웃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마감 시간을 단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다. 여드름이 나지만 피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세지만 겸손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집중력이 꽤 뛰어나다. 항상 먹고살 궁리를 한다. 어려운 일과 맞닥뜨리면 좌절하기보다 수습책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것도 오규란이, 지금 내 손을 맞잡고 있는,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했던, 지금도 예뻐 죽겠는 바로 그 사람이, 진심을 다해 나를 사랑한단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바로 그 남자이므로.





글_강진우(feat. 오규란)

그림_오규란



자유기고가 강진우

blog.naver.com/bohem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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