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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 Jul 30. 2021

부치지 못한 편지

할머니에게

할머니, 나는 늘 당신을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더군요.


나는 어릴 때 당신의 집에 가는 것을 참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아빠와 엄마가 학교가 끝난 저를 데리러 왔어요. 차에는 언니도 있었고요. 아빠는 할머니 댁에 간다고 했습니다. 나는 울며 불며 소리를 질렀지요. 가지 않겠다고요.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당신의 집에 갔을 때 흐르는 공기가 싫었습니다. 어두웠어요. 칙칙하기도 했고요. 쾌쾌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작은아버지 가족이 오면 매캐함까지 더해졌지요. 그 공기가 싫었습니다.


친구들은 다들 명절이 좋다던데, 저는 명절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명절에는 늘 고성과 눈물이 흩뿌려졌으니까요. 당신의 집에 가기 싫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엄마도 당신 집에 가는 걸 참 싫어했습니다. 아빠는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한다며 우리를 설득하곤 했습니다. 제가 명절에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은 그 대가로 받은 이천원 즈음의 돈이었습니다. 언니와 나는 평소에 사먹을 수 없는 과자를 사먹었죠. 괴상한 액체를 섞어서 물에 떨어뜨리면 개구리알이 되는 불량식품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천원짜리 과자로 명절의 불행을 가리는 건 여덟 살까지만 유효했지요.


우리가 조금 더 크자 엄마는 우리에게 당신에게 당한 '수모'를 풀어놓기 했습니다. 단골 이야기가 몇 가지 있는데, 혹시 하늘에서 들으셨는지요. 변명할 것이 있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엄마가 언니를 낳은 후에 할머니 생일이 있었다고 하지요. 언니를 낳고 몸이 아파 입원을 했었는데, 할머니는 왜 당신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냐고 하셨대요.


아빠는 가난한 목회자였습니다. 당신은 권사였어요. 할아버지는 장로였고요. 그러니까, 당신들도 신앙이라는 걸 가진 사람이었던 거죠. 엄마는 임신했을 때 돈이 없어 우유 한팩을 사먹지 못했대요. 맥심 커피에 에이스 과자를 찍어먹는 걸 좋아했다는데, 그럴 수 없었대요. 그런 살림에 한 푼 한 푼 모아 명절에 당신께 10만원 용돈을 드리면, 당신은 너무 적어서 불만이라는 티를 내셨답니다. 더 많은 용돈을 가져다준 다른 아들네 가족을 참으로 기뻐하셨다면서요.


일화는 많지만 엄마가 가장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를 낳은 다음에 생긴 일이지요. 나를 낳고 엄마가 많이 아팠다고 해요. 우리를 돌볼 수 없었고, 입원을 했답니다. 저는 외할머니댁에 언니는 할머니 댁에 맡겨졌습니다. 언니는 그때 20개월쯤 되었을까요. 어느 날 엄마가 누워있는데 언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대요. 그래서 무턱대고 당신 집에 찾아갔답니다. 마침 그 집에는 언니와 같은 또래의 작은아버지의 딸도 맡겨져 있었다고 해요. 당신의 집 문 앞에 도착했는데 언니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으앙 으앙.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한켠에 언니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대요. 코에는 콧물이 가득 고여 보글보글 맺혀있고, 연신 기침을 했대요. 열도 났답니다. 감기에 걸린거죠. 그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딸을 둘러앉고 감기약을 먹이고 있었대요. 엄마는 그 자리에서 언니를 끌어안고 나왔습니다. 다시는 당신의 집에 나의 언니를 맡기지 않았지요.


혹시 하실 변명이 있으시다면 해주실래요? 저는 엄마가 잘못 보았거나, 오해했다고 믿고 싶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오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난한 목회자의 가족이었던 우리보다, 사업을 하며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었던 다른 아들들 가족을 당신은 늘 더 아꼈으니까요.


아빠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외로웠나봐요. 가난한 목회자의 삶을 이해받고 지지받지 못했던 아빠의 삶은 외로웠나봅니다. 그래도 당신이 한 가지 잘한 점이 있어요. 우리 아빠를 낳은거지요. 훌륭한 아들을 낳았어요. 외로웠지만 우리 아빠는 나와 언니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키웠습니다.


당신이 죽은 날, 나는 장례식장에 가기 싫었어요.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요.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은 당신의 죽음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응당 슬퍼야하는데 슬프지 않았어요. 그래서 묘한 감정이 들었죠. 마치 외부 손님처럼 당신의 장례식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에 다녀온 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았어요. 냉장고의 음식이 썩었고, 나는 흐리멍덩했습니다. 일 년 즈음을 당신의 장례식 예배 순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미움과 분노를 품고 사는 삶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당신이 살아있었을 때 뭐라고 해볼 걸 싶었습니다. 차라리 화라도 내고, 따지기라도 해볼걸. 당신과 화해를 하고 당신을 하늘로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이 나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아니, 나의 엄마와 아빠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어서 용서하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당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아빠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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