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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 Jul 30. 2021

주고 받는 삶에 대해

나누는 삶의 기쁨을 알지만 나누기 힘든 지금을 사는 평범한 이들에게

   지난 주말 부모님 댁, 시골에 다녀왔다. 아침에 눈을 뜨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기 위해 차가운 공기가 감싸는 논길로 들어섰다. 아빠의 팔짱을 끼고 목도리를 둘둘 말고 걸었다. 강아지는 옆에서 폴짝거렸다. 아빠와 밀렸던 수다를 떨며 한참을 종알거리는데 좁은 시골길로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딸기 농사를 짓는 교회집사님 부부가 내리셨다. 두 분을 따라 영롱하게 자라는 딸기와 파릇한 딸기 잎을 구경했다. 두 분은 바구니 한가득 신선한 딸기를 담아 건네주셨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말로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내 입꼬리는 올라갔고 손은 앞서 나갔다. 덥석 받았다. 딸기를 품에 안고 코를 훌쩍이며 들어와 출근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는 "보면 예린이는 먹을 복이 참 많아."라고 말하며 빠알갛고 신선한 딸기를 베어물었다.


    엄마가 내게 먹을 복이 많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고 부모님께 칭얼대면 하루 이틀 사이로 누군가가 집 문 앞에 걸어두고 가거나, 직접 가져다주신 일이 여러 번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곶감이다. 곶감은 그 시절 우리가 사먹기에는 비싼 음식이었으나, 나는 곶감을 참 좋아했다. 그럴 때면 난 먹을 복이 있다는 나의 복을 한껏 신뢰하며 선언했다. "나 곶감 먹고 싶어!". 그리고 며칠 뒤 누군가의 선물로 난 곶감을 먹었다. 주로 교회 집사님들이 목사님 댁에 나눠주기 위해 귀한 것을 싸서 가져다주셨기 때문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들과 일치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받으면서 사는 삶에 익숙했다. 시골에 살아서 또래가 없었는데, 붙임성이 좋은 나는 동네 할머니들 집에 덥석 놀러 가서 맛있는 떡이나 잼을 듬뿍 바른 빵, 종종 인삼정과까지 잔뜩 얻어먹고 왔다. 최고는 설탕에 절여둔 딸기를 쇠그릇에 듬뿍 담아주셔서 퍼먹었을 때다.


    그만큼 엄마 아빠도 많이 나누셨다. 엄마가 요리한 음식이 담긴 접시나 통을 들고 이웃들에게 방문하면서 생색을 내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부모님은 때로는 이웃과 돈을 나누기도 했고, 때로는 지역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교회를 적극 활용하기도 하셨다.

    

    이것이 내가 배운 세상이 순환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리였다. 사람과 사람은 원래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면서 사는구나. 내가 나눈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순환 고리 속에서 나에게 돌아오고, 누군가가 나에게 베푸는 것은 기쁨으로 받으면 되는구나. 삶이라는 것은 원래 주고받으면서 풍성해지는 것이구나.


    부모님 곁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면서도 그 삶의 원리를 자연스레 따라 했다. 김치찌개를 끓이면 룸메이트나 옆집 친구를 불러 나누어 먹었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여기저기 후원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잔고와 삶의 계획들을 곱씹으며 기꺼이 나누던 내 손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나누고 보니 사실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가진 게 많은 사람인 걸 알게 되었고, 나누려고 하니 내가 가진 게 많이 없어 자꾸 불안해졌다. 세상에 맛있고 좋은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면서, 나누기보다 내가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다. 집에 돌아갔을 때 채워져있지 않은 냉장고와 누구도 차려주지 않는 내 밥상을 채워내기 위해 애쓰다 보니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가락만 분주했다.


    엄마는 항상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살 때보다 남에게 줄 때 더 좋은 것을 사라고 가르쳐줬다. 내가 가진 것이 여러 개라면 그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나눠주라고 했다. 근데 그러기가 싫어져버렸다. 그런 나를 욕심쟁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계산적인 사람이라 해야 할지, 혹은 똑부러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걸 체감하며, 어떻게든 내 손에 쥔 것을 놓치기 싫어진걸까. 내가 나눈 것이 세상의 어떤 순환고리를 돌아 나에게 돌아온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설사 사람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돌려주신다고 믿었는데, 그렇지 않아보이는 고된 경험이 켜켜이 쌓여서 그런 걸까. 이것은 단연 나뿐만의 경험일까. 누군가에게 베푸는 손길을 내밀려다가 움츠려드는, 넉넉하고 여유롭지 못한 우리 마음은 나의 것만은 아닐 테다.


    나누며 풍성했던 나의 어린 시절의 삶. 나눠서 즐거웠고, 그래서 가득 찼던 삶.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느꼈던 그때. 어쩌면 그때의 경험은 나의 부모님이 만들어준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었던 엄마, 아빠의 삶, 때로는 두려워 두 손 가득 움켜쥐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베풂을 주고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사람들. 부모를 떠나 홀로 서기를 한 우리에게,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해주는 세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이 나에게 차려준 매일의 밥상이 나에게 넉넉한 마음을 주었던 것처럼, 세상이 적어도 우리에게 매일의 밥상만큼은 보장해주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우리 집 냉장고에는 친구 부모님이 싸주신 김치 두 통이 놓여있다. 내가 받은 이 김치가 우리에게 한 번 더 용기를 주었으면. 더 많은 김치가 서로의 냉장고에 있기를.


어느 겨울, 선물로 받았던 오렌지와 천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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