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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 Feb 06. 2023

화정, 세상의 숨은 기쁨을 모두 찾아내어 웃는.

나의 친애하는 어른들, 1편.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화정. 이름에 꽃-화가 들어가서 그런지 꽃처럼 맑고 밝게 웃는 사람. 몇 년 전에는 홍대 근처에 작은 꽃집을 열어 정말 세상에 꽃을 가득 내어놓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에 꼭꼭 숨어있는 온갖 기쁨을 죄다 찾아내어 호탕한 웃음을 거칠게 뿌리는 그녀. 도대체 저 웃음은 어디서 찾아낸 거야, 싶게 불쑥 들이밀고 웃는다. 나이는 들수록 아름다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사랑스럽고 귀여운 화정.


나는 화정의 두 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과외선생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한 첫 번째 과외였다. 교회 마당에서 그녀는 ‘그럼 우리 애들 한 번 가르쳐봐 줄래요?’라고 물어보았고, 그녀가 나를 믿어준 덕분에 나는 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자전거를 타고 화정의 집에 갔다. 망원동에 있는 작은 빌라였다. 1층에 철물점이 있어서 화정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짐이 잔뜩 쌓여있곤 했다. 


화정의 집 왼쪽 작은 방에 앉아서 그녀의 아이들과 만났다. 그녀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나는 둘째와 셋째를 가르쳤다. 둘째는 진지하게 공부하지만 잠이 많은 아이였다. 거의 이삼 년 동안 과외를 했기 때문에 나는 화정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면, 스스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런 날은 둘째가 실신 상태로 잠을 자고 있는 날이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손발도 길쭉한 그 아이를 깨우는 것이 수업의 시작이었다. 나중에 화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깔깔, 웃었다. 머리가 복잡한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다. 화정이 어렵게 어렵게 번 돈을, 아끼고 아껴서 시킨 과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화정은 아주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야, 예림아 너 진짜 웃긴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해요. 깔깔. 


둘째와는 진로 고민을 참 많이 나눴다. 나와 함께 수업하는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모두 보냈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 자주 그리고 깊게 대화했다. 화정은 나에게 종종 말했다. 우리 예림이가 선생님을 진짜 좋아해요! 정말 고마워요. 하고. 둘째가 고등학교에 가던 때, 화정은 고기 뷔페에 나도 함께 데리고 갔고, 둘째가 고등학교에서 전교 회장이 되던 때, 화정은 호쾌하게 웃으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화정의 호쾌한 웃음이 담백하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은 둘째가 무엇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둘째이기 때문에 그냥 피어나는 웃음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담백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 담백한 웃음이 고귀하게 느껴졌다.


셋째는 춤을 좋아하는 아주 명랑한 아이였다. 당시 세상을 꽤 좁게 보며 살던 나는 공부와 성적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셋째와 함께 하는 수업 시간의 반은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썼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과 네가 지금 지루하게 영어 공부를 하는 것과는 어떤 연결이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셋째는 수업 시간에는 끄덕이며 공감했고,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하지만 춤추는 이야기를 할 때는 반짝반짝거렸다.


스무 살에 불과했던 나의 세상은 아주 작았고, 그때의 나는 춤을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멋진 장래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셋째에게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셋째야 미안해). 과외선생이 되었으니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야 된다는 직업적 책임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부모인 화정은 좀 달랐다. 그녀의 세상은 나보다 넓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는 그냥 셋째를 사랑했던 걸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화정은 오히려 셋째가 춤 출 수 있는 방법들을 열어주었다. 나에게 셋째가 어디에서 어떤 춤을 췄는지 자랑스럽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애가 하고 싶은 거 해야죠’라는, 부모들이 모두 쿨하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그 말을 정말 쿨하게 했다. 그 당시 셋째에겐 화정의 지지가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스무 살의 나는 화정이 참 멋진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화정의 모습이 나의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만들어주었다. 어떠한 모습의 삶이어도 괜찮다는 것을, 나는 화정이 자신의  딸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웠다.


화정은 보통 밤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기 때문에, 나는 수업을 하며 화정을 그리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가끔 화정이 집에 있는 날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락앤락 뚜껑을 하나씩 열면 반찬들이 나왔다. 잘 못 먹고 다니는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 그 식사가 따뜻했다. 화정이 끓인 미역국을 먹으며 미역국 끓이는 게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나에게 화정은 미역국 레시피를 연신 설명해주었다. 어느 날의 멸치볶음은 아주 딱딱해서 네모낳게 굳어 있었다. 화정은 부엌에서 칼을 가져와서 그 멸치볶음- 아니 그 멸치벽돌을 쪼갰다. 그러면서 ‘깔깔 깔깔. 아니, 무슨 멸치볶음이 이래~ 아주 벽돌이야, 벽돌! 아이고 이렇게 만들면 안 됐는데~.’ 하며 쪼개서 나온 멸치 조각들을 내 밥숟가락에 올렸다. ‘아이고 선생님 이거 어떻게~ 이거 먹어요. 이거 쪼개놓은 거~ 먹어~.’ 벽돌처럼 굳은 멸치볶음이 삶의 유희가 되는 순간이 좋았다.


나는 솔직히 화정의 집에 드나들며 화정의 삶이 벅찬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집값이 나날이 치솟는 서울에서 화정의 가족은 빌라에서 전세로 살았다. 자녀는 셋이었다. 화정과 화정의 남편은 보통 늦은 시간까지 매일 일했다. 그런데 화정은 자주 깔깔거리며 담백하게 웃었다. 벅차고 고된 삶을 다 깨뜨리는 웃음으로. 화정은 다니던 직장에서 잘려 잠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의연했다. 꽃집을 시작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꽃을 배울 때도 화정은 “아니 내가, 천을 만지면서 습득한 감각이 또 남아 있었다니까. 그때도 잘 어울리는 색들 맞춰보고 이런 거 했어서 그런지, 내가 또 금방 배우네?”라며 웃었다. 새벽부터 꽃시장에 다니고, 늦은 시간까지 꽃을 만질 때도 화정은 빛났다. 


나는 그 담백한 웃음을 담고 싶어, 결혼 사진을 찍을 때 화정에게 꽃을 부탁했다. 보통 신부들은 부케에 매우 민감하고 화정은 부케를 한번도 만들어 본적이 없었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튜디오 촬영장으로 화정의 남편이 직접 꽃을 배달하러 오셨고, 꽃은 화정을 닮아 상쾌했다. 꽃을 보며, 나도 화정처럼 살아야지, 했다.


화정은 깔깔거리는 사람이었지만, 가볍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두 아이를 맡아 가르치던 어느 날, 화정에게 전화가 왔다. 지쳐있는 몸을 질질 끌면서 길을 걷다가 그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제가 과외비 십만 원 더 넣었어요. 지금까지 좀 적게 드렸던 거 알아요. 그래서 계속 죄송했어요. 적지만 이번에 좀 더 입금했어요.”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지 남에게 베풀 수도 있다는 말이 화정의 앞에서 초라해졌다. 화정의 십만 원은 경제적인 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정함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정의 다정하고자 했던 결심은 그녀의 웃음만큼이나 호쾌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화정의 두 딸과 연락하며 가까이 지낸다.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가 되었다. 어느 날 둘째가 물었다. 언니는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좋아? 잘 모르겠다. 다만, 삶이란 것은 본디 벅차고 고된 것이다, 라는 명제와 삶이라는 것은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명제가 함께 춤출 수 있다는 걸 화정을 보며 배웠다.


나는 가끔 삶이 벅차다고 느껴질 때 화정을 생각한다. 그리고 화정의 꽃집에 가서 꽃을 산다. 화정이 말이 아닌 삶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예린 선생님, 안심해요. 깔깔 웃어봐요. 우리 삶에는 아무일도 없을거에요.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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