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린 Mar 26. 2019

나는 오늘도 대충 살지 않았다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21세기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21세기의 일입니다.
유령들, 허수경 발췌
2019년 3월, 이때만 해도 하루면 퇴원할 줄 알았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눈을 떴더니 몸이 상쾌하지 않고 뻐근하였다. 7시간 정도 잤는데 몸은 흐물거리는 미역같았다. 그래서 30분을 더 누워있었다. 너무 늦게 일어나는 건 아닌가, 대학원생이 누리는 사치일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정직하고 솔직한 나의 몸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해주는 건 굉장한 결심을 필요로 한다. 그럼 우린 무엇에 귀 기울이고 살지? 하여튼 이런 생각은 너무 많이 했으니까, 답은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3월에 입원했었다는 아주 단단한 핑계 혹은 변명 아니면 무엇을, 기대고 나는 30분을 더 잤다.

 

 눈을 뜨고 일어났다.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이려고 어제 미리 머리를 감고 말리고 잤다. 아침시간은 1분이 10분 같은데 밤은 10분 1분 같아서, 머리를 감는 것과 같이 하찮은 일은 밤에 하기 좋다. 아, 그리고 어젯밤 12시에 도시락도 싸 두었다. 냉동해물볶음밥을 슥슥 볶아서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옆에 담아두었다. 왜냐하면 오늘 나의 일정은 촘촘하니까.


 그런데 아침에 30분을 더 누워있었던 탓일까, 배가 고팠다.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의 일정을 되뇌었다. 학교 가서 논문 보다가 교수님을 만나고, 스터디 준비모임, 그리고 광화문으로 병원에 갔다가, 다시 목동으로 가서 봉사활동. 식사하기 영 애매한 일정이었다. 이 생각들이 슥슥 스쳐가자, 싸 둔 도시락을 다시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평소에도 느리게 먹는 편이지만, 아침에는 더욱 빨리 못 먹는 탓에,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씹으며 옷을 입고, 다시 한 숟가락 입에 넣고 가방을 챙긴다. 


 학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10분. 3번의 환승이 있다. 오늘은 좀 늦게 나서서 다행히 붐비지는 않겠다. 하지만 잦은 환승, 그리고 그중 2번은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기는 어렵다. 나는 멀미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나서기 전, 가장 최근 뉴스 팟캐스트를 다운받는다. 다운은 집에서 받아야 한다. 나는 한 달에 750MB를 주는 최저가 핸드폰 요금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오물오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든든히 먹었다. 가방을 들고, 텀블러에 뜨거운 물 반 냉장고에 있는 찬물 반을 섞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리고 집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가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한다. 전화가 끝나면 미리 다운로드하여둔 뉴스를 듣는다. 어제 있었던 중요 이슈들을 요약해서 다양한 관점까지 착실히 내 귀에 넣어준다.


 3번의 환승, 그러니까 총 4개의 구간 중 앉아서 갈 수 있은 단 하나의 15분 정도의 구간이 있다. 그때는 앉아서 영어공부를 한다. 영어로 수업하고 영어로 글을 쓰지만서도, 여전히 부족한 내 영어를 다독이며, 15분 동안 듣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환승을 한다. 그러면 다시 뉴스를 듣는다.


 학교에 도착했다. 연구실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없는 연구실. 히터를 틀고, 가습기에 물을 받아 켠 후 겉옷을 벗고 자리에 앉는다. 아, 전날에 버리지 않고 둔 쓰레기. 한 켠에 미뤄두고 노트북을 켠다. 오늘을 일정을 본다. 오늘은 P선생님과 M선생님과 진행 중인 논문의 가락을 잡아야 하고, 1시에는 지도교수님과 면담이 있다. 아, 그럼 면담준비를 먼저 다시 챙기고 논문을 봐야겠다. 


 컴퓨터에 정돈된 폴더들을 차곡히 열어, 지도교수님과 나눌 이야기들을 살핀다. 집에서 챙겨 온 파인애플 푸딩을 먹으며 살핀다. 지난 주말, 남자친구와 이마트에서 데이트하면서 산 100퍼센트 과즙 파인애플 푸딩이다. 2개에 할인해서 2800원. 혼자 있었다면 사 먹지 않았을 가격의 고급 푸딩.


 많이 달지 않으면서 맛있다, 하며 글을 읽고 체크하다보니 어느덧 1시가 되었다. 아. 아직 논문 못 봤는데. 면담하며 볼 자료를 인쇄하러 뛰어간다. 교수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오고 있어요?'

'지금 가요. 곧'


 걸음을 서둘러 교수님 연구실에 도착한다. 그래도 첫 입학할 때보다는 낫다. 교수님 말에 구체적인 질문을 해가며, 나름의 내 생각을 펼쳐가며, 또 정성껏. 나는 또 정성껏 시간을 보냈다. 2시가 되었다. 교수님 연구실을 나서며 핸드폰을 켰다. 


'저는 10분 늦어요'

'저도요. 지금 면담 끝나서 책 놓고 바로 내려갑니다!'


 또 걸음을 서둘렀다. 2시. 성실하고 정겨운 선생님들과 만나 스터디 방식과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 명은 컵밥을 다른 한 명은 샌드위치를 먹는다. 나는 아까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사 온 2000원짜리 빵을 꺼냈다. 스터디 이야기도 나누고, 근황도 나누고, 농담을 던지며 웃다보니 이 분들은 수업 갈 시간. 2시 40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다시 연구실로 올라갔다. 다시 일정표를 켜고 내가 얼마나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지를 가늠했다. 어, 서둘러야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고 했던 계획은 미룬다. 가방을 챙기는데, 드는 고민. 내일 어차피 아침부터 학교 올 건데 최소한의 짐만 챙겨야지. 뭐를 챙기지. 멀미가 심한 탓에 무거운 짐을 매고 대중교통을 타는 괴롭다. 가방에서 짐을 몇 개 덜어내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아, 늦었다.


 병원 예약은 4시다.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여러가지가 있다면, 가장 솔직한 아이는 내 몸. 몸이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걸 계속 무시하면 다른 존재의 요소들도 위협받는 경험들이 차곡히 쌓여, 몸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인다. 지하철 앱을 켜서 여기서 광화문까지 걸리는 시간을 보니 4시 2분 도착. 역 내려서 걸어갈 생각까지 하니 꼼짝없이 늦었다. 가장 빨리 출구로 갈 수 있는 플랫폼 넘버를 확인하고 거기로 향한다.


 이 노선은 아침이나 점심이나 저녁이나 늘 사람이 많다. 다행히 오늘 아침 30분을 더 잔 탓일까, 아직 4시여서 일까, 앉지 않아도 죽을 것 같진 않다. 가끔 9시, 10시, 11시. 이렇게 지하철을 타면 가방은 천근이요, 눈꺼풀은 만근, 찢어질 듯한 머리를 끌고 지하철에 있자면-아니 버티자면, 생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랄 뿐. 다행히 오후 4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지하철에 사람이 꽤 많았으므로, 나는 가방을 손으로 꼬옥 잡은 채, 살짝 긴장하며 지하철에 올라탄다.


 앉지 않아도 버틸 만 하지만, 지하의 쾌쾌함과 사람들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 끊임없이 부딪히는 소리들과 몸들, 이런 것들은 지친다. 나의 눈동자는 빈자리를 찾는다.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데, 내 앞자리 빼고만 다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내 인생에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더 열심히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빈자리를 찾아 풀쩍 뛰어 앉는 사람, 난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어서, 곧 일어날 것 같은 사람을 찾아 그 앞에 서 있는다.


중간 즈음, 앞사람이 일어선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꾸벅꾸벅 존다. 왜 피곤했던 거지, 아직 4시도 안된 나에게 궁금했지만 꾸벅꾸벅. 4시 02분. 지하철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찾아 나선다. 병원으로 걸어가는데 한 관광객이 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낸다. 


'OO호텔. OO호텔.'


 한국어도 영어도 못하는 일본인이다. 나도 모르는 곳이라 내 핸드폰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위치를 설명한다. 왜 영어였을까. 급하지 않았더라면, 지하철이 좀 덜 힘들었다면, 웃으며 천천히 설명했을 텐데. 급히 설명을 해주고 지나간다. 나는 왜, 급한데도 그들을 도왔을까. 


 병원에 도착하니 4시 20분. 다행히 앞 환자가 밀려 내 순서가 지나지 않았다. 진료를 기다리며 가방에서 '아카데믹 잉글리시' 공부 자료를 꺼내 읽는다. Bad가 아니라 negative...relationship이 아니라...symbiotic..하다보니 내 순서다. 진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고 시계를 본다.

5000원의 빅이슈

이제 남은 일정은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 이동하고도 30분 정도가 남는다. 그때 저녁을 간단히 먹어야지, 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건물에서 나오자 빅이슈를 파는 아저씨가 양 손에 빅이슈를 들고 '빅 이슈 사세요.'를 외친다.


'아저씨 저 이걸로 하나 주세요'


 아저씨에게서 시큰한 냄새가 난다. 노숙인들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면 나는 그 냄새가 코를 살짝 찌른다. 아저씨는 둔탁한 엄지손가락을 찬 바람 속에서 움직여 카드결제를 해주신다. 


5000원. 내 통장에 3월 생활비 7만원이 들었는데. 5천원을 긁는다. 매일매일 활자를 읽는 게 내 일이거늘, 난 과연 빅이슈를 읽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7만원에서 5천원을 긁는다. 


 3월인데 바람이 차다. 아저씨는 코를 훌쩍이시고.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니, 올리브영. 할리스커피. 스타벅스. 그리고 아주 높은 건물들 사이로 지나가는 수많은 생명체들. 아,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사나- 

아주 잠깐 질문하고 다시 지하철로 뛰어들어간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매거진의 이전글 한 교수의 배움으로의 초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