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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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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Mar 12. 2021

지갑 안 들고 온 날

지갑을 안 들고 왔다. 지하철 개찰구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맙소사. 다행히 가방에 현금이 있다. 딱 8천 원. 음... 머리를 굴려 본다. 왕복 교통비에 점심 계산은 계좌 이체나 카카오페이로 할 수 있으려나? 일단 가자. 다시 집에 돌아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리니깐.


실은, 지갑을 안 가지고 나온 게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도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 헐레벌떡 나오다가, 마찬가지로 지하철역에 도착해서야 지갑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집에서 지하철역은 도보 10분. 음.. 집에 돌아갔다 오면 약속 시간에 늦는다. 아... 그날도 다행히 가방에 현금이 있었다. 그때도 8천 원이던가. (현금 보존의 법칙?) 지갑은 카드 지갑이어서 주민등록증과 체크카드 한 장 달랑 들어있고, 현금은 잘 안 써서 가방 주머니에 그냥 놓여 있다.. (미안 현금아) 머리를 굴려 보니, 오늘 이동할 교통비 정도는 나올 듯싶었다. 오케이, 전진이다. 뭐 친구가 밥 계산하면 돈 보내주면 되니깐.


후불 교통카드를 쓰는 이라면 아마 일 년 내내 거들떠도 안 볼 교통 카드 기계로 갔다. 음, 오랜만에 말하려니 이름도 잘 모르겠는 그 기계로 가서 일회용 교통 카드를 누르고, 도착지 역을 찾아 돈을 넣고 뽑았다. 도착지는 안암역이고 보증금 500원을 넣어 약 2천 원가량의 돈을 계산했다. 휴, 도착지에 도착해 친구와 만나 텐동을 맛있게 먹고, 계좌 이체를 해 주었다. 친구와 헤어져 필라테스를 가기 전까지 시간이 떴다. 아 마침 스타벅스 기프티콘이 있다. 스타벅스의 좋은 점은 번화가 근처라면 어디든.. (정말 어디든) 있다는 것이다. 필라테스 센터가 있는 미아사거리역으로 이번에는 버스를 현금 내고 탔다.


"저.. 현금 넣었는데 거스름돈 좀..(우물우물).."


천 원짜리 두 장을 넣어 잔돈을 받아야 하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새삼 인상이 험상궂다.


"얼마 넣었다고요?"

"네?"

"얼마 넣었냐고요."

"아 2천 원이요.."


귀도 잘 안 들려서 겨우 묻는 말에 대답하고 잔돈을 받았다. 아니, 기사 아저씨가 이렇게 무섭게 생겼을 줄이야! 미아사거리역에서 내려서 스타벅스에 도착해 기프티콘으로 음료 한 잔을 사서 행복하게 음미하고, 운동을 갔다가, 의정부에 있는 영어 학원으로 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까지, 그 날 지갑 없이 잘 다녔다. 물론 첫 버스의 험상궂은 기사 아저씨와의 대면으로 그다음 버스를 탈 때는, 현금을 넣으면서 크게 외쳤다.


"저! 현금 2천 원 넣었어요!"

"아, 예.."


평소에 교통카드 삑- 삑- 찍으며 생각 없이 다녔던 루트를.. 현금으로 넣으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물론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내릴 때 과금도 안 되고, 교통 카드를 안 찍고 내려도 되니 이게 주는 은근한 홀가분함이 있다. 그렇지만, 난 이미 교통카드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소시민이기에..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 다짐하며, 그 날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또..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문제없지. 익숙하게 지하철 교통 카드 기계에 가서 목적지를 입력하고, 돈을 넣는다. 음, 일회용 카드 또 만났네? 오늘은 작업실만 지하철로 왕복하면 되니, 문제없다고! 마침 있던 점심 약속도 취소되어, 오늘의 현금 8천 원 중 3천 원을 들여 시장에서 바나나를 사 들고 출근했다. 그래, 8천 원 중 왕복 교통비 3300원, 바나나 3천 원이면 무려 1700원이나 남는다. 매일 마시는 커피는 마침 사둔 원두가 있으니,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시면 된다고!!! 완벽해.


그나저나 내 지갑이 어디 갔을까, 혹시나 흘린 경우를 대비해 체크카드를 정지할 생각은 안 하고, 일단 카드 안의 현금을 다른 계좌로 이체해 둔다. 혹여 내 지갑을 주운 나쁜 손이(?) 편의점에서 카드를 이용할라 치면

'삐빅- 잔고 부족입니다.'라고 뜨게.


"손님, 잔고 부족인데요."


하하하.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도둑은 얼굴이 빨개져 도망가겠지.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수소문을 해보니, 아니 사실 집에 있던 엄마에게 연락해 카드 지갑의 행방을 물으니 금방 지갑은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나 여기 있소.' 나타났다. 혹시 하고 봐 달라고 한 외투 주머니 안에 지갑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나와 함께 외출을 하고 싶지 않고, 하루 집에서 푹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집을 나서기 직전, 한껏 봄 날씨가 되어가고 있으니, 평소 입던 외투에서 좀 더 가벼운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입던 외투에 카드지갑을 넣은 것은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불한당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모쪼록 남은 돈을 계산해, 바나나 한 송이를 사면서 '문득 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미 머리는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다. 내가 무지 입맛이 고급이라던가, 바나나 한 개로는 내 점심으로 족하지 않아!라고 울고불고하는 사람이었다면, 오늘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아 무지 불편했을 텐데 다행이야.


물론 자기 합리화다. 오늘은 돈이 매우 필요한 날이 아니니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것일 뿐. 나는 머리 쓰는 일에는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몸 쓰는 일은 썩 어설프다. 시리얼 봉지를 뜯을 때 꼭 몇 알 흘리고, 물을 붓다 보면 또 흘리고, 음식도 잘 흘린다.. 지갑 잃어버린 적도 여러 번이요, 지하철역 화장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적도 어느덧 두 번이고.. 아무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매우 덤벙댄다. 그럼에도 착한 시민들 덕에 딱 한 번 아이폰을 잃어버린 적 빼고는 지갑과 핸드폰이 다 내 품으로 돌아왔다. 이런 나도 일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건,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완벽하지 않은 존재고, 그러니 서로 돕고 사는 거고, 이 정도의 작은 실수들로 삶이 콰광! 무너지진 않기 때문 아닐까.


그래도 지갑을 집에 두고 오는 일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족하다. 마침 가방에 현금이 없으면 곤란하고, 지각하고.. 그럼 또 내 머리를 콩 치며 '아아.. 나란 존재란..'하고 자책할 테니 말이다. 좀 더 어설프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은데, 일단 오늘은 무사히 남은 현금으로 집에 돌아가고 나서 생각해야지. 이 참에 6년간 충성해 온 아이폰 대신 삼..ㅅㅓㅇ..페이.. 아 아니다, 집 나서기 전에 준비물 잘 챙겼나 단속 잘하면 될 걸. 여태껏 이걸 못 하니 이렇게 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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