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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Dec 27. 2023

허리케인이 온다고요?

미국에서 1년 살기

TV가 없어서  뉴스도 안 보고 지내던 어느 날, 워싱턴에 사는 SJ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주말에 거기 비 많이 올 거라는데, 대비를 좀 해 놔야 할 거야."

노트북으로 CNN 뉴스를 찾아보니 초강력 허리케인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근데 무슨 대비를 어떻게 해야 해요?"

"물 같은 거 미리 사다 두고, 수도가 끊길 수도 있으니까 욕조에도 물을 좀 받아두면 좋아. 전기가 끊길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파워뱅크 같은 대용량 배터리를 사는 건 좀 그렇고... 그리고 차도 나무 옆에는 세우지 말고 가능하면 차고에 넣어둬."

"우린 차고 같은 거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허리케인이 길레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나무가 쓰러진다는 거지?

영화에서나 보던 그 빙글 뱅글 돌아가는 그런 토네이도가 지나가는 걸까?



태풍의 예상경로를 보면 뢀리 중심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 바로 옆으로 태풍이 지나가는 건가?'

학교에서 목요일부터 휴교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휴교공지까지 받고 나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식료품들도 떨어지고 아이들이 나흘 내내 집에 있으려면 반찬거리도 좀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물과 비상식량들도 챙겨둘 겸 코스트코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코스트코 근처로 갈수록 차들이 막히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늘 왜 이렇게 차들이 많아?'



코스트코에 도착하자 생전 처음 보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넓고 넓은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고, 한참을 기다려 간신히 주차를 하고 난 후에도 건물주위를 빙 둘러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입장해야 했다.

"와, 진짜 장난이 아니다. 무슨 전쟁 난 것 같아."

이미 집에서 대형카트까지 챙겨 온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가면 입구에 카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히 주차장에서 차에 짐을 다 옮겨 실은 사람의 카트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입구에는 카트가 하나도 없어서 줄을 서서 내내 기다리던 사람들도 카트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며 입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코스트코 내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매장 안을 보고서야 왜 그렇게 입장 대기줄이 긴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물건 사이에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은 없고 그저 길게 줄을 서있을 뿐이었다.

우리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줄을 보니 도저히 이러다가는 오늘 안에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사람들과 카트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간신히 줄 가장 앞까지 가보니 그 기나긴 줄이 생수를 기다리는 줄이었다.

일찌감치 다녀간 사람들로 인해 동이 난 생수를 채워놓기 위해 창고에서 생수들을 꺼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걸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와... 정말 이럴 일이야?'

다시 줄 맨 뒤로 가서 기다릴 생각을 하니 너무 막막해서 물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빵이나 과일 같은 것만 담아 코스트코를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애들이 며칠 집에 있으니 돈가스나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돼지고기 안심 덩어리를 카트에 넣은 걸 보면 나는 이때까지도 태풍이 온다는 걸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둘러 코스트코를 빠져나오는데 주차장에서 나가는 차들도 정체돼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도대체 왜 이럴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거의 모든 차들이 바로 나가지 않고 주유를 하고 가려고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정말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아. 왜들 저래?"

남들이 다 하니까 우리도 주유를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생수까지 포기하고 나온 마당에 자동차에 기름을 넣겠다고 이 기나긴 줄을 또 기다린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간신히 중간에 빠져나왔다.

나오면서보니 주유소에 빨간 글씨로 솔드아웃 표지판이 걸리고 있었다.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니...



그래도 물을 사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오다 월마트에 들렸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이 한번 훑고 지나간 듯 월마트의 진열대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물은커녕 코스트코에는 있던 달걀과 통조림들까지 싹 비워져 있었다.

'진짜 큰일 났구나.'

텅텅 빈 진열대를 보니 조금씩 이 상황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파워뱅크도 아닌 자잘한 배터리들을 왜 그렇게 사가는 건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는 걸 보니 약간 무서워졌다.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태풍을 생각하는 건가? 하긴, 학교가 며칠 전부터 휴교할 정도면 정말 심각한 걸 거야.'



설마설마하며 집 앞의 타겟매장에 들렀지만 여기에도 역시 생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가서 욕조와 통이란 통엔 모두 물을 다 받아둬야겠다 생각하다가 정말 마지막으로 홀푸드에 가보기로 했다.

너무 다행히도 솔드아웃이던 물이 방금 전에 새로 도착해서 잔뜩 쌓여있었다.

정신없이 카트 두 개를 물로 가득 채우면서 너무 많은가 싶었지만 마트 3개에서 허탕치고 만난 물은 너무나 소중해 보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수영장의 썬배드와 테이블, 파라솔까지 싹 치워져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고 하늘은 너무 맑고 파란데, 이것이 폭풍전야일까?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은 태풍을 피할 겸 여행을 떠나는 집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주차장이나 거리엔 오히려 차들이 별로 없었다.

차고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나무와 멀리 떨어진 주차장 한복판에 차를 세워두고 제발 무사하길 빌었다.

만약 태풍피해로 자동차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 모든 것을 또 영어로 설명하고 요구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국에서도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이 고요함에 얼떨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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