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1학년인 둘째 아이가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어머~어머~ 벌써 그렇게 친해진 거야?" 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반 친구들 모두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의 말에 의하면 요즘 같이 노는 친구들 중 하나라서 생일선물을 꼭 주고 싶다니 생일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초대장 가장 마지막엔 R.S.V.P. 란에 전화번호인 듯 한 숫자들이 적혀있었는데 인터넷에 찾아보니 프랑스어인 Répondez s'il vous plaît의 약자였다.
영어로 표현하면 Reply Please,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회신을 해달라는 뜻이겠다.
적혀있는 번호로 그날 파티에 참석이 가능하고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마트에 가서 친구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골라보기로 했다.
들뜬 아이도 아이지만 나도 여기서 아이 친구의 생일을 챙기는 건 처음이라 선물은 이 정도 가격대면 되는지, 포장은 어느 정도 해야 할지 몰라 꽤나 신경이 쓰였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한국이랑 별 다를 게 있겠어?'
요즘 1학년들 사이에서 최애 캐릭터라는 장난감과 생일카드, 포장지, 그리고 선물을 담을 쇼핑백까지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선 집에 굴러다니는 게 쇼핑백이었는데, 여기 와선 제대로 쇼핑을 한 적이 없으니 집에 있는 거라곤 마트 비닐봉지들 뿐이었다.
100원이면 될 쇼핑백을 $5이나 주고 사야 한다는 게 꽤나 속이 쓰렸지만 마트의 수많은 포장용품들을 보니 과연 아이들 생일파티는 어떨지 더욱 기대되었다.
아이는 최대한 예쁜 글씨로 생일카드를 써주겠다며 따로 공책에 글씨연습까지 한 후에야 카드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장난감 부피가 꽤 커서 포장지도 엄청 많이 들고 쇼핑백도 가장 큰 걸 사야 했다.
'그래, 자그마한 것보다 큼지막한 선물을 받으면 기분도 더 좋겠지.'
정성 가득한 카드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아이는 생일파티날인 토요일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날이 다가올수록 무거워져만 갔다.
같은 반 엄마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결코 짧지 않을 스몰토크의 시간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다시금 아이 친구들의 이름을 되뇌며 '플레이데이트 때 나누는 대화'를 검색하고 미리 공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드디어 토요일이 되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니 생일파티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맥도널드였다.
미국에 와서 맥도널드는 처음이었는데 왠지 익숙한 메뉴들을 보니 반가웠다.
매장 한편에는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커다란 실내놀이터와 테이블들이 있는 놀이방은 매장과 살짝 분리되어 있어 아이들이 마음껏 돌아다니거나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속시간보다 겨우 5분 정도 먼저 도착했는데 우리가 1등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생일 당사자인 아이와 부모도 그때쯤 도착해서 부랴부랴 생일테이블을 꾸미고 있었다.
'나라면 한 시간 정도는 미리 와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 같은데, 그런 문화가 아닌가?'
미국에 와서 가장 헷갈리는 건 이게 우리와 문화차이인 건지 아니면 그저 그 사람의 성격인건지가 구별이 안 되는 거다.
온통 처음 겪는 일들과 상황들이다 보니 항상 긴장하고 위축된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저 어렵기만 했다.
'얼마나 지나야 조금씩 수월해질까?'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이 하나 둘 도착하며 부모들과 인사도 하고 아이가 가장 친하다는 친구의 얼굴도 익혔다.
아이들은 서로 인사하자마자 놀이터로 달려가 계단을 오르내리며 무한루프에 빠진 양 정신없이 뛰어놀았다.
파티 주최자인 엄마가 생일파티 테이블을 준비하랴 인사하랴 너무 정신없어 보여서 선물들 정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맥도널드 직원인 듯 한 사람이 다가와 너무나 열심히 주변을 정리하고 장식하는 걸 도왔다.
'어머, 여긴 직원이 저렇게 알아서 척척 다 도와주네. 생일파티 하기에 너무 좋다.'
하지만 둘이 얘기하는 걸 가만 들어보니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큰딸인 듯했다.
그럼 그렇지. 그냥 직원이 이렇게 성심 성의껏 아이들 생파를 준비해 줄 리가......
파티 음식들이 나와서 아이들은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피밀스러운 생일파티 음식은 치즈버거 하나, 음료 하나, 감자튀김과 사과조각이 전부였다.
'그럼 우리는?'
이럴 수가, 아이들 음식 외에 함께 온 부모들을 위한 음식은 전혀 없었다.
한국에선 아이들 생일파티이더라도 부모와 함께 오는 저학년 때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안 엄마들끼리 자연스레 함께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어른들이 먹을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을 준비했었다.
그래서 12시인 생일파티 시간에 맞춰 나오면서 당연히 점심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
너무나도 정직한 나의 배꼽시계는 배고프다는 신호를 울리고 있었고,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 곤욕스러웠다.
'원래 이런 건가? 아이들것만 준비하는 건가? 커피 한 잔 도 없다니...'
왠지 좀 서운하기도 하고 배려가 없게 느껴지는 건 내가 잘못된 걸까?
꼬르륵 소리가 날 것 만 같은 속을 달래며 집에 갈 때 꼭 빅맥세트를 포장해 가리라 마음먹었다.
선물포장을 보니 마트에서 봤던 얇디얇은 색색의 종이들이 어떤 용도인지 알게 되었다.
쇼핑백에 선물을 넣고 그 위에 구겨 넣어 선물이 보이지 않게 하는 용도였다.
재밌네... 미국은 과대포장이 갑이라더니 역시.
점심을 먹자마자 아이들의 무한루프는 다시 시작되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을 정도로 땀에 흠뻑 젖으면서도 아이는 깔깔대며 친구들과 뛰어다녔다.
마치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 양 너무나 즐겁게 노는 아이를 보니 괜히 또 뿌듯해졌다.
비록 부모들과의 스몰토크는 여전히 나에게 스트레스이지만 아이를 위해 앞으로는 자주 친구들과 플레이데이트를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흥분한 아이들을 겨우 진정시키고 생일축하를 위해 케이크 앞으로 불러 모았다.
생일인 친구는 부모님의 나이가 꽤 있어 보이고 언니와도 나이차이가 많아 보여 늦둥이인가? 하며 서 있었는데, 옆에 서 있던 한 아빠가 인사를 건네며 스몰토크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얘기에 친절하게도 아이들이랑 가면 좋을 곳들을 구글 지도까지 보여주며 추천해 주었다.
궁금하거나 물어볼 게 생기면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도 교환했는데, 과연 내가 문자라도 보낼 일이 있을지...
그러고 보니 엄마보다 아빠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은 것도 신기했다.
한국에선 생일파티는 당연히 엄마가 참석하는 거였는데.
당연한 건 아닌가? 하긴, 아빠는 오지 말란 얘기도 없었는데 왜 당연히 엄마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장소 대여시간이 두 시간 정도였던지 슬슬 파티를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풍선을 하나씩 받아 들고 월요일에 학교에서 만나자며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주차장으로 나오면서까지 인사를 나누는 바람에 빅맥을 사 오는 걸 깜빡 잊어버려서 할 수 없이 집에 오자마자 라면을 끓였다.
치즈버거 하나 먹고 두 시간 내내 뛰어놀던 아이도 배가 고팠는지 옆에 앉아 한 입만 달라고 하다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결국 아이에게 그릇째 주고 다시 라면을 끓이는 나를 보며 남편은 생일파티에 가서 다들 굶고 왔냐고 놀렸다.
'그래, 부모들 식사까지 준비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거야. 집에서 하는 생일파티도 아니었으니 장소 대여료도 꽤나 들었겠지. 이해하자, 이해하자......'
결국 아이에겐 신나는 시간으로, 나에겐 신라면 두 개로 기억되는 생일파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