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 있는 일 년 동안 아이들에게는 총 네 번의 방학이 있었다.
그 네 번의 방학마다 아이들과 미국 전역을 누비고 싶었지만 미국이 워낙 넓은 데다가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한 곳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심플하게 네 번의 방학 동안 동서남북으로 한 번씩 다녀오면 어떨까 싶었다.
일단 방향성이 생기고 나니 자연스럽게 대략적인 여행지도 추려졌다.
첫 번째 방학에는 아이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디즈니월드와 유니버설스튜디오가 있는 남쪽으로 여행지를 잡았다.
한국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출발했는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학기가 바로 시작되는 바람에 아이들에게 이번 방학은 여름방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첫 번째 방학은 아이들이 가고 싶어 했던 디즈니월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는 올랜도를 거쳐 마이애미에 들렸다가 미국의 최남단이라는 키웨스트까지 찍고 돌아오는 10박 11일의 장거리 여행을 계획했다.
긴 여행에 아이들이 지치지 않도록 4개의 디즈니월드 파크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리고 디스커버리코브 중 절반은 키웨스트로 가는 길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문하기로 했다.
하루에 파크 하나씩 도장 깨기를 할 생각에 벌써부터 아이들은 신이 났다.
하지만 파크와 숙소 예약부터 10박 11일의 짐을 챙겨야 하는 나의 머릿속은 터져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차에 실으면 된다며 이것저것 다 챙겼다가도 짐이 거의 이삿짐 수준까지 늘어나자 다시 하나씩 줄이기 시작했다.
분명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별로 없었는데, 그 새 살림살이들이 어찌나 늘었는지 트렁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필요한 건 그때그때 마트에 들르기로 하고 차에서 먹을 간단한 간식들과 한국마트에서만 살 수 있는 김치와 라면, 그리고 삼각김밥 재료들만 챙겼는데도 이미 한 보따리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려면 틈틈이 배를 채울 수 있게 도시락을 꼭 챙겨야 하기 때문에 전기밥솥도 챙겼다.
파크 안의 먹거리들은 비용도 문제지만 그것만 몇 날 며칠을 계속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질려버릴 것 같았다.
우리의 첫 장거리 여행인 만큼 남편은 지난 며칠 동안 차량정비에 진심이었다.
타이어 공기압이나 엔진오일 같은 전반적인 차량점검은 물론이고 차 안팎을 광이날 수준으로 닦아놓았다.
아이들을 위해 태블릿 거치대도 장착해 두고 목적지까지 가는 도로들을 찾아보며 통행료같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없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마냥 신나기만 할 것 같던 아이들도 개인짐을 싸면서 나름 고민이 많은 듯했다.
꼭 가져가야 할 애착템과 아쉽지만 두고 가야 할 물품들이 수십 번도 더 바뀌며 가방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긴장되고 설레는 여행준비기간이었다.
여행 전날밤 완벽한 컨디션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꿈속에서 짐을 싸느라 힘들어하다 보니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여행하는 건 한국에서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동안 수없이 상상하며 짐을 쌌다가 풀었는데도 모자란 모양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설레서 잠을 설쳤는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아침까지 든든히 먹고 준비를 마쳤는데도 8시였다.
Waze에 목적지인 숙소를 입력해 보니 도착 예상시간이 오후 5시였다.
쉬지 않고 내리 달려도 9시간이나 걸리니, 하루종일 차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소중한 낮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제저녁에 출발해서 밤새 달려 도착했겠지만, 미국에서의 밤운전은 왠지 엄두가 안 났다.
처음 가보는 지역들인 데다 혹시 모를 사고를 피하고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여행 중에 장거리 이동은 낮에만 하기로 했다.
이동거리는 631마일, 약 1015.5킬로미터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320킬로미터 정도 된다니 우리가 오늘 가려는 곳이 얼마나 먼 곳인지 실감이 났다.
지도로 볼 땐 그렇게 멀지 않아 보였는데, 미국이 참 넓긴 넓구나.
출발에 앞서 모두 안전운전을 다짐하며 파이팅 했다.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이번 여행을 잘 다녀오길, 일단 오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길.
떨리고 긴장되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다운로드된 영화들이 가득 담긴 태블릿을 거치대에 장착한 후 헤드셋까지 두 개나 연결해서 영화를 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아이들은 아이스박스에 가득 차 있는 음료수와 간식거리들을 보며 비즈니스석도 부럽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루종일 차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과자들뿐만 아니라 달걀과 고구마도 삶고 각종 빵에 삼각김밥까지 간식을 잔뜩 준비했는데 운전을 하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져서 중간에 따로 식사시간도 없이 계속 뭔가를 먹었다.
두 개의 주를 지나며 내리 달리는 도중에 쉬는 시간 없이 화장실만 잠깐 들렀지만 남편과 교대로 하니 운전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도로가 한적하고 차선이 넓어서 크루즈기능을 사용하니 더 수월했던 것 같다.
절대 과속하지 않고 정속주행하며 완벽하게 모든 규칙을 지키며 운전하는데도 숨어있는 경찰을 발견하면 괜히 긴장이 됐다.
꼬박 하루를 차에서 보냈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달라지는 바깥 풍경을 보는 건 장거리 여행의 또 다른 재미였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밤은 정말 잠만 자고 나올 거라 내일 방문할 디스커버리코브 인근의 제일 싼 숙소로 잡았는데, 해가 지고 나서 도착한 숙소의 외관은 왠지 영화에서 많이 본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CSI 같은 범죄드라마에서.
사무실 바로 앞에 차를 바짝 대고 남편이 키를 받아 나오길 기다리는 와중에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의심스러웠다.
그 잠깐 사이에도 차 문을 잠그고 기다리는데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창문을 두드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영어공부한답시고 범죄물만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인 듯했다.
키를 받아 나온 남편을 태워 다시 배정받은 방으로 이동해서 방 바로 앞에 차를 대고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면서도 연신 주변을 살폈다.
얼른 짐을 챙겨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까지 치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구글 평점과 후기를 엄청나게 찾아보며 골라서 그런지 그나마 내부는 깔끔한 가성비 좋은 숙소였다.
달리는 차에서 벗어나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이들에게 방의 크기나 인테리어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대로 누워 저녁도 안 먹고 씻지도 않고 그냥 잘 거라던 아이들은 막상 컵라면과 햇반을 보더니 방앗간의 참새처럼 모여들었다.
방 한쪽에 있는 작은 티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컵라면을 먹다 보니 조촐한 저녁이었지만 이것 또한 여행의 재미구나 싶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에너지를 되찾은 아이들은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재잘대며 도통 잘 생각이 없었다.
온종일 운전하느라 이미 방전된 남편과 나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빨리 침대에 눕고만 싶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제일 먼저 입장해서 신나게 놀 수 있다며 아이들을 달래 잠자리에 들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내일 아침에 먹을 메뉴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할 것 같던 아이들은 누운 지 얼마 안 돼 바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온몸이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바로 잠에 들 것 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놀거리들에 두근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