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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3. 2024

커피를 끊는 중입니다

어쩌면 대운이 열릴 기회인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지. 디카페인이라는 커피 중독자의 한 줄기 빛 같은 꼼수도 있지만 사용 기한이 임박한 쿠폰 사용이 아니라면 그마저도 멀리했다. 최소 하루 한 잔, 습관처럼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일상에서 지운 듯 빠졌다. 대신 물 아니면 카페인이 없는 차(페퍼민트차, 캐모마일차, 국화차 등)가 그 자리를 채웠다.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놓고 홀짝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걸 인생 최대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매일 진격의 거인이 머리를 자근자근 밟는 듯한 두통을 달고 살았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을 털어 넣었다. 병원 순례를 하며 검사도 했다. 속 시원하게 해결된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의사는 일단 커피부터 줄이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잠을 푹 자야 한다는 뻔하지만 당연한 당부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생각 없이 물처럼 마시던 커피양을 서서히 줄여도 커피 한 잔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성인 1일 카페인 권장량에 한참 못 미친다.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감자가 아닌 생산활동을 하는 인간으로 살려면 그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커피 못 마셔서 스트레스받는 게 카페인보다 더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뭐 설탕이랑 크림 듬뿍 들어간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닌데 순수하게 물과 커피만 들어간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는 괜찮은 거잖아?라고, 자기합리화했다. 의사의 당부에는 귀를 닫고 대신 입을 열어 커피를 마셨다.      


머리가 아파 자꾸 예민해지고,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충분히 자지 못하니 더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 화가 났다. 관자놀이를 재봉틀로 박는 것 같은 두통 때문에 만사가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종류를 바꿔가며 먹어 봐도 약은 두통을 지워주지 않았고,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역시 해결책은 커피 끊기뿐인가?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슬쩍 커피 마시는 걸 멈췄다.


그렇게 커피와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둔 지 일주일. 두통은 더 심해졌고,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랄 때쯤, ‘카페인 두통’에 대해 알게 됐다. 카페인을 꾸준히 섭취하던 사람이 카페인을 끊으면 생기는 일종의 금단현상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래, 이 정도면 시도는 좋았어. 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선택이었어.’라고 포기하며 커피를 다시 들이켰을 거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일주일 도전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2주가 지나도 두통이 여전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며 참을성 없는 나를 달랬다. 그렇게 커피 없는 2주를 지나 한 달이 넘어간다. 그 사이 두통은 서서히 사라졌다. 커피를 마시건 마시지 않건 여전했던 두통은 자취를 감췄고, 잔뜩 흐리다가 해가 나온 하늘처럼 머릿속은 맑게 갰다.


성인이 된 후, 아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 중독자의 일상에 커피가 쏙 빠졌다. 고카페인이라는 에너지 음료나 콜라 같은 탄산음료는 즐겨 마시지 않으니 내 증상은 카페인 중독이 아니라 커피 중독에 가까웠다. 카페에 가면 차를 시키게 됐고, 점차 카페에 가는 횟수도 줄었다. 대신 조금 더 걷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땀을 식힌다. 평생 드신 커피믹스가 맛이 없다며 하루아침에 커피를 끊었던 아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그 좋아하는 커피와 언젠가 이별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커피와 헤어지는 중이다. 언제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될지 모르겠다. 당분간일지, 영원히 일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요즘 당연했던 것들과 하나둘 헤어지고 있다. 커피도, 일도, 사람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이 ‘영원한 건 없어’라고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추켜올리며 나를 향해 쌍X큐를 날리고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변화에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어쩌겠나? 시간이 지나면 작은 자극도 견디지 못할 만큼 정신과 몸은 낡고, 관계는 헐거워지고, 시선은 어긋나는데. 그래도 다시 마시기 전까지는 커피를 끊으니, 차의 세계에 눈을 뜬 것처럼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게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이다.

      

커피를 끊는 게 뭐 대단한 일일까 싶지만, 커피 중독자에게는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큰일이다. 얼마 전 SNS에서 <인생에 대운이 들어올 때 나타나는 징조>에 대해 읽고 이거다 싶었다. 사람에게 대운이 오기 전, 이런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첫째, 낯선 일에 도전한다. 둘째, 인간관계가 변한다. 셋째, 작은 일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넷째, 분위기와 마음 자세가 변한다. 그래 이거잖아? 지금 내 상태! 얼마나 큰 대운이 들어서려는 걸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지독한 확증편향 때문이겠지만 뭔가 밑도 끝도 없이 대운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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