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잘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
얼마 전 일요일 오후, 점심 먹을 때 아빠가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전국 노래자랑>을 보던 부모님이 껄껄 웃으셨다. 참가자의 포스가 심상치 않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홉 살 어린이는 제 키만 한 나무 지팡이까지 짚고 할머니 흉내를 내며 무대에 섰다. 능청스러운 MC는 할머니를 대하듯 깍듯하게 맞이했다. 평소 건강 유지 비결이 김치에 밥, 그리고 된장을 먹는다는 어린이 할머니는 출연한 김에 친구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답했다.
잘 살어~
아흔 살 할머니가 말하듯 구수한 그 한마디에 관객들은 박장대소했다. 곧이어 노래를 시작했고, 구성진 매화타령을 불렸다. 국악을 배우는 어린이의 깜찍(?)한 재롱에 부모님은 느릿느릿 움직이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노래를 마치고 내려가려던 참가자를 잡아 세운 MC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잘 살어~
그 한마디에 <전국노래자랑> 객석도, 우리 집 식탁 위도 초토화됐다. 일요일 오후 느닷없이 떨어진 ’잘 살어~‘ 이 말에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거동이 불편해 쥐며느리처럼 등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계시는 게 대부분이었던 사람. 그렇게 누워 있다 체력을 회복하면 겨우 앉아 시골집 나무 마루를 닦는 게 일상의 대부분이었던 할머니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인사하면 할머니는 충청도 특유의 말투를 듬뿍 담아 말했다.
잘 살어~
그 말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 무탈하게 지내라, 비뚤어지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공부 잘해라, 부끄러운 일 하지 말고 살아라 등등 평생 할머니가 습관처럼 하던 잘 살라는 당부가 아홉 살 어린이 덕분에 오랜만에 소환됐다.
요즘 난... 잘 살고 있나?
일요일 오후, 비빔국수를 먹으며 <전국 노래자랑>을 보다 느닷없이 나를 돌아보게 됐다. 고만고만한 글이 나오는 거 같아 사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하지만 그 마음을 꾹 누르고 그냥 글을 쓴다. 커피 러버 인생에는 절대 없을 거 같았던 커피도 끊고, 꼬박꼬박 운동도 한다. 매일 산책도 하며, 18:6 간헐적 단식도 한다. 얼마 전에는 요가 수업에서 핸드 스탠딩(손으로 바닥을 짚고 팔과 어깨로 땅을 밀어내면서 몸을 거꾸로 세우는 동작)도 성공했다. 일주일에 2~3권 책 읽는 것도 무리 없이 하고 있고, 한 달에 한 개씩 평생 안 해 보던 일을 해 보는 2024년 나만의 프로젝트도 실패 없이 진행 중이다. 외부 활동은 최소화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것처럼 초토화된 몸과 마음을 정상화하기 위해 잠수하듯 한참 가라앉아 흐트러진 나를 정돈하며 살고 있다.
오랜만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선배, 잘 살고 있어요?”
그 흔한 인사에 잠시 멈칫했다. 돈, 집, 차, 일 등등 요즘 사람들 기준에 ’잘 살아‘ 보이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잘 살고 있지. 넌 어때? “
그렇게 내뱉어 버리고 나니 오히려 후련했다. 남의 눈에는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내 기준에 잘 살고 있으니까. 남들이 뭐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든 당당하게 ’잘 살고 있다 ‘고 말할 자신감이 생겼다. 말에 담겨 있다는 이상한 영력, '언령(言靈)’처럼 잘 살고 있다고 말하면 잘 살게 될 거 같은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 생겼다. 잘 살고 싶으니 잘 살기 위한 재료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그 재료들로 일상을 내 입맛대로 맛있게 요리하는 일이 나름 재미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 방식대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또 다른 허리케인이 몰아쳐도 잠시 흔들리겠지만 방황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내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