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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22. 2024

등산 같은 건 대체 왜 하는 거야?

설악산 대청봉 등반기


7시간째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등산 같은 건 대체 왜 하는 거야?‘ 한계령에서 시작해 설악산 대청봉을 찍고 오색 방향으로 하산하던 내 앞에는 끝없는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말이 돌‘계단’이지 불규칙한 모양의 돌이 계단 모양으로 놓여 있을 뿐. 높이도 폭도 들쑥날쑥하고, 새벽에 내린 비로 미끄럽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한발 한 발 내딛는 중이었다. 자칫 방심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산악구조대에 신세를 지는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다리는 물론 스틱을 쥔 팔까지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발바닥은 화끈거리다 못해 너덜거리고 근육이 뭉쳐 어기적어기적 걷기 시작한 지 총 9시간 반쯤 지나자, 계곡 물소리가 잦아들고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사람 사는 동네에 가까워졌구나. 그 소리는 곧 길고 길었던 <설악산 대청봉 등반>이라는 10월의 도전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2024년 매월 한 가지씩, 평생 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도전 중이다. 극강의 계획형 인간이지만 이 미션만큼은 충동적으로 실행한다. 오래 생각하면 겁이 많아져 시도하기를 주저하는 내 성격을 잘 아니까. 집 근처 산들 즉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은 종종 다녔다. 한라산은 몇 번 올라가 봤으니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에 언젠가는 가봐야지 막연하게 생각했다. 몇 장 안 남은 달력을 보니 이 순간을 놓치면 내년을 기약해야 할 거 같았다. 도시보다 겨울이 빠르게 찾아오는 산은 곧 첫눈이 내릴 테니까. 눈 쌓인 산도 사랑하지만, 작고 귀여운 체력의 내가 눈 내린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험한 산을 오르긴 아직 무리다. 그러니 눈 내리기 전에 가야 한다. 이번 10월이 최적기다. 빠르게 검색해 그나마 초심자가 가기 좋은 대청봉 루트를 알아봤다. 보통 들머리를 거리가 길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한계령에서 시작해 대청봉을 찍고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은 오색 코스를 날머리로 추천했다.      


좋아! 일단 가자.


루트를 정한 후 숙소 예약과 시외버스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7시 10분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날은 대청봉 등반 전 워밍업 삼아 울산바위를 보러 신선대(성인대)에 올랐다. 왕복 2시간 내의 가벼운 산행이었다.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를 감상하면서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청봉이 뭔데 이렇게 워밍업 등산까지 하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 컨디션을 위해 내가 택한 건데도 어이가 없었다. 속초 시내를 거쳐 다시 남설악의 시작 오색으로 향했다. 한때 오색 약수가 유명했지만, 이제는 음용 부적합 결과가 나와 뭔가 팥소 빠진 찐빵 같은 분위기의 작은 관광단지. 설악산 등반객과 온천 방문객이 오가는 동네 작은 모텔에 짐을 풀었다. 돌솥 산채비빔밥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내일 먹을 김밥과 간식거리를 챙겨 배낭에 넣은 후 내일을 기약했다.      


쫄보라 일출 산행은 접어 두고,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해가 뜨는 오전 6시쯤 한계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미리 화장실도 다녀오고, 스틱도 내 몸에 맞게 길이를 조절했다. 등산을 기록할 수 있는 아웃도어 앱도 켰다. 그리고 걸었다. 꾸역꾸역 올랐다. 때로는 양손까지 동원해 네발 동물처럼 올라야 하는 구간도 있었고,  유격 훈련처럼 줄을 잡고 온몸을 써서 올라야 하는 칼바위 구간도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다 못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심박수가 치솟았는데도 움직인 거리를 확인하면 겨우 200미터 남짓. 산속의 시계는 속세의 시계와 다른 속도로 가는지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점점 지체됐다.      


그간 등산해 온 짬이 있으니 쌩초보 보다 뭐라도 낫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일찌감치 대청봉을 찍고 내려오던 하산객들은 내 몰골을 보자 괜찮냐고 물었다. 머리는 산발에 핏기 없는 팥죽색 입술을 보고 곧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걱정됐는지 생판 모르는 분들이 이렇게 말했다.     


힘든 구간 다 끝났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물 드릴까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안산 하세요.(‘안’ 전한 ‘산’ 행하세요.)     


한라산 등반 경험으로 물은 넉넉히, 가볍고 열량이 높은 간식을 종류별로 챙겨둔 터라 굳이 신세 질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일면식 없는 사이지만 같은 시간대에 같은 산에서 마주친 인연으로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 ‘는 말이 등산객들 사이의 흔한 ’ 하얀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힘이 났다.       


약 6시간 만에 대청봉 정상석과 마주했을 때,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전날까지만 해도 날씨가 맑을 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새벽부터 비가 내렸고, 길은 미끄러웠다. 정상은 안개로 곰탕처럼 뿌옇게 보였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인증숏을 찍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나도 그 틈에 껴서 평소라면 찍지 않을 인증숏을 찍었다. 한 번 올라봤으니 최소 2년간은 대청봉에 올라갈 일은 없을 거 같아서. 서둘러 하산하지 않으면 해가 질 거라는 설악산 단골 등산객의 조언에 마음이 급했다. 지고 온 김밥 한 줄을 마시듯 먹고 하산을 서둘렀다. 오색으로 향하는 하산길은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고 너덜길과 뾰족 바위가 어우러져 있는 한계령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한 놈이 나타났다. 험할 거면 가파르지나 말던가, 가파를 거면 험하지나 말던지. 괜히 국립공원 측이 지정(?)한 ‘매우 어려움’ 코스가 아니었다.

     

내려가는데도 이 정도인데 이 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존경스러웠다. 최단 코스라는 달콤한 말에 속아 오색 코스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스틱 같은 장비도 없이, 등산화 대신 운동화에 묵직한 트레이닝팬츠 차림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악랄한 코스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올라오는 무모함을 발휘할 수 없었을 거다. 내가 하산하던 시각은 오후 1시. 해지기 전에 하산하기는 이미 무리인 시간이지만 감히 희망을 꺾을 수 없었다.


힘든 구간 다 끝났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물 드릴까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안산 하세요.(=‘안’ 전한 ‘산’ 행하세요.)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올라올 때 들었던 그 말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슈퍼 내향인이라 낯가림이 신생아급이지만 산에서만큼은 오지랖을 떨게 된다. 조금 전까지 숨을 헐떡이며 죽상을 한 채 올라가는 내 모습과 닮은 등산객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산에 가고 싶어 진다는 건 일상에 답답함을 느낀다는 신호다. 삶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을 때는 생각이 많아진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저절로 산이 떠오른다. 산에 오르는 동안 온몸을 괴롭히는 통증은 잡생각을 지운다. 꾸역꾸역 올라가 정상에 섰을 때의 쾌감은 성취감으로 돌아온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아 보인다. 내가 머리 싸매고 전전긍긍하던 일이 티끌만큼 작게 느껴진다. 먹고 마신 껍데기 같은 쓰레기는 꼭 챙겨 오고 대신 나를 괴롭히던 쓰레기 같은 고민을 산에 버리고 온다. 그게 바로 등산 같은 걸 하는 이유다. (게다가 하산 후 기다리고 있는 파전과 막걸리나 맥주에 치킨 같은 먹부림은 등산의 화룡점정이다.)     


9시간 반 내내 ‘등산 같은 건 대체 왜 하는 거야?’라고 구시렁거렸지만, 며칠 동안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또 일상으로 돌아와 살다 보면 머지않아 또 산에 가고 싶어질 거다. 설악산 대청봉 효과가 희미해질 때쯤 나는 또 다음 등산을 계획하고 있을 거다. 살다 보면 대청봉에 내다 버리고 온 쓰레기 같은 고민이 빠져나간 자리에 또 다른 쓰레기 같은 고민이 하나둘 쌓일 테니까. 그때까지 산에서 들었던 그 말, 산에서 내가 했던 그 말을 곱씹으며 하루하루 버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힘든 구간 다 끝났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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