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캐리어 분실 사건의 전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여행 출발 전부터 계획 짜느라 지쳐 버리는 사람과 일단 가는 사람. 나는 확신의 전자다. 여행 가기도 전에 방전되는 방법은 대략(?) 이렇다. 내게 허락된 날 중 적합한 여행지를 찾는다. 이미 가슴속에는 늘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가 있기 때문에 그중 기온, 날씨, 번잡도, 환율, 현지 상황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해 목적지를 정한다. 날짜와 여행지가 정해지면 합리적인 가격대의 교통수단을 예약한다. 그리고 여행 일정과 위치, 청결도, 가격을 따져 숙소를 정한다. 다음은 볼만한 곳, 먹을 만한 곳, 사야 할 것들을 체크하고 날짜별 일정을 배치한다.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예약을 해두고, 짐을 싼다.
이때쯤 되면 여행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뇌는 포화상태가 되고, 에너지는 급격히 떨어진다. 먼저 다녀온 여행자들의 후기를 많이 봐서 여행을 마친 기분이다. 대부분 현실 여행은 상상 여행에 비해 만족도가 떨어진다. 상상 속 여행은 연착도, 관광객용 바가지도, 갑작스러운 맛집 휴무도 없다. 여행의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여행 전부터 계획을 짜느라 나를 소진하진 않는다. 여행의 ‘짬‘이 쌓인 이유도 있을 거다. 무엇보다 계획에 연연하지 않게 된 건 완벽한 계획은 없다는 걸 깨달은 ’그 사건‘ 때문이다.
소위 J형 인간, 파워 계획형 인간이 계획을 짜는 이유는 준비성이 철저해서도 계획을 짜는 데 희열을 느껴서도 아니다. 극강의 효율을 원하기 때문이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아까웠다. 내가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무한대인데 허락된 시간과 돈은 한계가 있으니, 효율이 중요했다. 허용범위 안에서 최고의 효율 뽑아내기에 혈안이 됐다. 사전에 계산을 꼼꼼히 하면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이동 가능한데 게으름 부리다 택시를 타는 것 같은 멍청 비용은 내 사전에 없었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을 못 견디는 지랄 맞은 성격도 한몫했다. 통제적 성향이 강해 설정한 값을 예상했다면 그 답이 똑같이 나와야 직성이 풀렸다.
오후까지 알차게 마카오를 구경하고 호텔 체크인 시간에 맞춰 페리를 타고 홍콩으로 넘어올 계획이었다. 호텔에 짐을 맡긴 후 근처 완탕면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홍콩 야경의 꽃,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본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간단한 입국 심사 중 귀신이라도 씐 걸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캐리어를 챙기지 않고 그대로 페리 선착장을 빠져나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택시를 기다리다 있어야 할 캐리어가 없는 허전한 손을 느끼는 순간 등골로 얼음이 미끄럼을 타는 것처럼 오싹했다. 이 일로 차후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통역 앱을 쥐고 어눌한 영어로 페리 터미널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다시 출발했던 마카오에 짐이 가 있을 거라고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이미 짐을 내렸을 텐데 왜 내 캐리어가 마카오로 돌아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시간과 차분한 언어능력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마카오에 다녀와야 했다. 일단 같이 온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호텔로 모시고 갔다. 여기서 쉬고 계신동안 후딱 다녀오겠다며 홍콩에 도착한 지 1시간 만에 다시 마카오로 향했다.
부모님 앞에선 침착한 척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삼류 영화 시나리오가 술술 생성되고 있었다. 만약 거기서도 없으면? 머릿속에서는 온갖 최악의 상황이 숏폼 영상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머릿속에서 셀프 전쟁을 치른 이유는 마카오->홍콩-> 말레이시아로 이어지는 15일간의 여행을 계획하고 한국을 떠난 지 겨우 3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12일 동안 28인치 캐리어에 꾸역꾸역 담아 온 짐 없이 어찌 버틸 수 있을까? 대충 홍콩에서 다시 옷과 생필품을 사야 하나? 아니면 부모님을 홍콩에 두고 당일치기로 한국에 다녀와야 하나? 여행은 엉망진창의 기로에 섰다.
답 없는 문제를 푸는 게 이런 기분일까?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다시 마카오에 내렸다. 좀이전 탑승권과 수하물 표를 내밀고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푸근한 인상의 직원은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네 짐은 지금 홍콩에 있어. “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을 들어 보니 애초에 내 캐리어는 홍콩에 도착 후 단 한 번도 페리 터미널 밖을 빠져나간 적이 없었다. 짐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홍콩 직원의 착오로 나는 하루에 마카오 <-> 홍콩을 두 번 왕복한 사람이 됐을 뿐이다.
짐 잃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배웅해 준 마카오 직원을 뒤로하고 홍콩에 도착해 수하물 내리는 곳으로 향했다. 지친 행색으로 들어가니 아까 그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인상 좋은 직원에게 다시 상황을 설명하니 기다렸다는 듯 캐리어를 가져다줬다. 반나절만의 캐리어 상봉. 그제야 한국 드라마를 사랑한다는 직원 아저씨의 TMI 토크도 웃으며 리액션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덜덜 끌고 부모님이 계신 호텔로 향하는 내내 허탈함에 푹 절인 오이지가 된 기분이었다.
여행은 내가 아무리 계획해도 돌발 상황은 발생했다. 내 실수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실수일 때도 있다. 심지어 탓할 원인 제공자를 찾을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예전 같으면 없는 시간과 돈을 쪼개 떠난 귀한 여행 반나절을 날린 실수를 자책하며 남은 여행을 꿀꿀하게 지냈을 나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겐 남은 날은 12일, 그리고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다. 정신적, 체력적 데미지가 컸던 캐리어 분실 사건을 빨리 털어 버리지 않으면 남은 여행을 망칠 위기였다. 계획보다 시간이 늦어지긴 했지만, 점찍어뒀던 완탕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야경은 포기하고, 저녁만 먹었다. 완탕면과 함께 그곳에서 꼭 시켜야 한다는 닭발 간장 조림과 초이삼 볶음을 시켰고, 계획에도 없던 돼지갈비 튀김 요리도 시켰다. 돼지갈비를 먹어야 에너지가 채워질 거 같았다. 땀에 전 몸으로 기름지고 짭조름한 돼지갈비를 우걱우걱 씹었던 그날 이후로 여행의 최우선 목표는 ’ 효율‘이 아니라 ’ 무사‘로 바뀌었다.
계획한 대로 실행해야 100점이 아니라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무사히 여행을 이어가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랜드마크를 가서 인증숏을 찍는 대신 무작정 아무 버스나 타고 끝에서 끝까지 가보기를 좋아한다. 계획 없이 중간에 내키는 곳에 내려서 동네 구경, 시장 탐방, 골목 헤매기를 즐긴다. 느슨한 계획은 여유를 만들고, 여유 사이에 생긴 구멍으로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이전에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여행은 계획한 목표 퀘스트를 깨는 게임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와 나와 나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였다. 여행의 방점을 ’ 미션 클리어‘가 아니라 ’ 무탈함‘에 두기 시작하면서 만족도는 한층 높아졌다. 그 만족감은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온 나를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