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에서 간장치킨을 꺼내면 생기는 일
약속이 있으면 일찌감치 약속 장소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 쫓기지 않고 여유 있게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평소 책만 잡고 있으면 한없이 늘어지는 편이라 정해진 시간 안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느슨한 쪼임‘이 내게는 큰 장점이다. 이 두 가지 이유가 나를 일찌감치 약속 장소 근처 카페에 도착하게 만든다.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약수역 근처 스타벅스 2층에 앉아 도서관 반납 기한이 임박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 50대 전후로 보이는 따뜻한 나라에서 온 듯한 어르신 두 분. 명동, 홍대, 성수처럼 이름난 관광지도 아닌 곳에 있는 모습이 생경해 눈이 갔다. 각자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낯선 언어로 통화를 했다. 누구를 기다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젊은 남녀 둘이 들어와 자리에 합석했다. 자식들과 한국 여행 중인 걸까? 한국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기를 바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뒤늦게 들어온 남녀는 갓 튀긴 간장치킨 박스를 테이블 위에 꺼냈고, 일회용 비닐장갑까지 챙겨 끼고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K-치킨의 명성이 대단하다더니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간부터 치킨을 드시네. 이제 막 오픈했을 치킨집에서 테이크 아웃해서 가져온 걸 텐데 한국식 치킨을 제대로 맛보는구나.’ 차오르는 국뽕과 함께 밀려드는 폭력적인 치킨 냄새에 정신이 혼미했다. 향긋한 캐모마일 차에 책을 곁들여 이른 가을의 주말 오전의 여유를 만끽하려는 계획에 ‘간장치킨‘은 없었다. 캐모마일티 향이 기름진 단짠 향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3층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서 짐을 챙기는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카페의 고요를 깼다.
“No chicken! “
테이블을 정리하러 온 직원이 이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외친 목소리였다. 직원의 음성은 단호했고, 그 가족(?)은 금세 수긍하고 서둘러 치킨을 정리했다. 소란을 피해 3층으로 자리를 옮긴 탓에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이 해프닝이 한국 문화를 몰라서 생긴 단순한 차이였다는 점이다.
몇몇 나라에서는 (스타벅스에서까지 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게 가능하다는 걸 들었을 때, 의아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니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자국에서 당연했을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짓이 될 수 있다.
살다 보면, 내게 당연한 '기본 에티켓'이라 믿었던 것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낯선 것일 때가 있다. 처음엔 당황하고, 화가 나고, '왜 이렇게 무례하지?'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몇 번 경험을 반복하고 나니,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모든 나라의 문화를 다 알 수 없듯, 모든 상황에서 완벽한 에티켓을 지킬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라는 걸 배운다. 상대방이 모른다고 다그치기보다, 서로 어색한 웃음을 나누며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때로는 “No chicken!”처럼 짧고 단호하게 규칙을 알려주는 게 더 친절한 방법일 수도 있다.
결국 나는 3층에서 다시 책을 펼쳤다. 치킨 냄새는 옅어졌지만, 대신 머릿속엔 이런 질문이 남았다.
“나는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무례한 여행자일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례한 사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