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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손절할 결심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해지는 법

by 호사


분명 알람을 맞춘 건 새벽 6시였는데, 눈을 뜬 건 7시 46분. 토요일 아침, 사람이 많아지기 전, 등산을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시작부터 삐거덕거렸다. 세수만 하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한 계절이니, 평소보다 분명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붐비기 전에 얼른 올라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등산로로 향했다.

8시 반, 등산 스틱을 세팅하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보니 생각보다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걸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하나, 둘, 셋— 등산 시작!


아웃도어 네비 앱의 시작 신호에 맞춰 등산을 시작했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데 이상했다. 예전이라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두세 번은 쉬어가야 하는 구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푹 잔 덕분인가? 여름 내내 뜨거운 햇볕, 변덕스러운 날씨, 벌레 공격 때문에 중단했던 등산. 그동안 나도 모르게 체력이 늘었나 보다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금세 알았다. 등산을 쉬는 동안 나는 러닝을 시작했다. 처음엔 10분만 뛰어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힘들었다. 그런데 조금씩 거리를 늘리고, 호흡을 익히고, 리듬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러닝이 즐겁다’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저 답답해서, 잠을 잘 자고 싶어서, 생각을 비우고 싶어서 뛰기 시작했는데 차곡차곡 쌓인 마일리지가 등산에서도 빛을 발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폐활량이 늘고, 다리가 단단해졌다. 하나의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운동처럼, 삶의 태도도 그렇다.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면 그건 다른 영역에서도 나를 도와준다.


예전의 나는 그 반대였다. 남의 말에 휘둘리고, 남의 표정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내 하루의 온도를 바꿔놓았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에도 괜히 상처받고,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했다. 개복치 심장, 쿠크다스 멘털, 유리 몸 같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내 감정의 리모컨을 맡긴 건 아닐까?


그날 이후 결심했다. 일단 나부터 챙기자.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게 보든, 비틀거려도 내 자리를 지키자. 그렇게 나는 조금씩 손절을 연습했다. ‘나를 해치는 패턴’을 손절했다.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애쓰던 습관, 내 마음보다 타인의 평가를 우선하던 태도, ‘좋은 사람’으로만 보이려는 집착 같은 것들. 말미잘처럼 남의 눈치에 촉수를 세우던 나에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줬다. 여행을 떠나고, 상담을 받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내 몸의 감각을 되찾았다. ‘오늘 하루 나를 잘 돌보는 일’이 결국 내 인생을 잘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만, 모두와 다 잘 지낼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말은 그 사람의 시선에서 나온 말일뿐 그게 진리도, 나를 규정할 근거도 아니다. 필요한 말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면 된다.


이제 나는 예전보다 단순하게 산다. 사람 관계도, 감정의 결도, 훨씬 단출해졌다. 대신 마음은 평온해졌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를 조금 더 신뢰하게 됐다. 그래서 오늘도 결심한다. 불필요한 관심과 거리를 두고, 건강하지 않은 습관과 이별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 대신 ‘잘 지내야 하는 나’를 먼저 챙긴다. 손절의 끝에는 단절이 아니라, 조용하고 단단한 회복이 있었다. 그건 결국 ‘나를 지키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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