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다 ‘좋아요’ 컨텐츠는 퇴사
2010년 11월은 추웠다.
언론인이 되겠다고 은행을 때려치고 백수생활을 한지 어언 1년이 다되가던 때. 여러곳의 신문사와 방송국 최종 관문에서 고배를 마시고 내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쳐박혀 있었다. 바로 그 때 혜성처럼 등장해 나를 구해준 곳이 이데일리다. 홍대 길바닥에서 전화로 합격소식을 듣고 친구들이랑 부둥켜앉고 울었던 기억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됐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초반에 우르르 선배들이 나가면서 울적할 때도 있었으나 기도로 준비하고 감사히 주어진 기회였기에 회사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내 주변엔 늘 좋은 선배들, 동료들, 취재원들로 가득했다. 많이 배웠고 늘 즐거웠다.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비록 회사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식당예약 전화하면서 이데일리요! 라고 하면 꼭 이대요? 이대리요? 라면서 몇번씩 말하게 했지만 누구의 입김도 없이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있는 몇 안되는 언론사 중 한 곳이었다. 이 곳에서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집도 샀고 유학도 왔다. 내게 세번의 휴직을 허해준 감사한 직장이었다.
뜻하지 않은 끝
남편이 유학을 마치면 당연히 복직할 줄만 알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나와 아이들만이라도 먼저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다. 영어 하나 가르쳐보겠다고 끌고온 아이의 학교는 다닌지 6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한 달 전에서야 다시 시작됐다. 이제 막 적응해서 신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에게 자! 이제 돌아가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엄마였던거다. ㅋㅋ미국에서 작은 경험이라도 쌓으려 고군분투하는 남편에게도 나 혼자 가겠다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결국 내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 결론을 내리고 나니 공교롭게도 입사 10주년이 되는 날 다음날이 퇴사일이 되버렸다. 10년 근속 상장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휴직자라 받을 수 없다는게 아쉬울 뿐이다.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회사에 고하고 나니 울컥 밀려오는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더라. 아쉬워하면서도 내 결정을 응원해준 많은 선배들과 어디서든 공짜로라도 글쓰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진심으로 충고해준 부장, 용돈벌이라도 소개해주시려 애써주시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이럴 줄 알았음 오기 전에 찬찬히 회사 구석구석 사진이라도 찍어놀걸.
입사 10주년 아침엔 동기들과 10주년 축하 줌맥을 했다. 시차땜에 아침 8시에 일어나 눈곱만 떼고 까지도 않은 맥주를 들었지만 너무 행복했다. 비록 지금은 전 언론사에 고루 포진해있지만 10년전 이데일리tv에서 단체로 다구리당하던 우리는 영원한 동기로 남을거다. 몇몇 선배들을 안주삼아 오징어처럼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이다ㅋㅋ
나의 청춘을 함께한 이데일리여, 이제 안녕!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거처럼 10년, 1만 시간을 채웠으니 또다른 10년을 준비해놓으셨으리라 믿는다. 선후배님들, 취재원님들, 동료분들 저 이제 이데일리 나옵니다. 그래도 저랑 함께해주실거죠?ㅋㅋ찬찬히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동부에 오시거든 꼭!!! 연락 주세요!! - 11.29.2020 입사 10주년에
최다 ‘좋아요’ 기록
위 글을 퇴사일 즈음 페북에 올렸다. 동료들과 취재원, 선후배들에게 일일이 인사할 수가 없어 뭐랄까 보고하는 의미에서 올린 글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페북 인생 15년?! 중에 가장 많은 좋아요와 댓글이 달렸다 ㅋㅋㅋㅋ내가 너무 처량하게 글을 쓴걸까. 난 그저 담담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고 나를 위로하고 응원한다는 연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ㅎㅎㅎ코로나땜에 계속 사람들은 못만나는데다 미국에서 퇴사를 하니 뭔가 사이버 퇴사같은 느낌도 들고 영 실감이 안났는데 이렇게나 내 퇴사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 아니면 모두가 하고싶은 퇴사 내가 대신 해주니 자기도 모르게 좋아요를 누르게 된걸까 ㅋㅋ
이러니 저러니 해도 퇴사는 우리네 월급쟁이들에겐 먹히는 컨텐츠임엔 분명하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