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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10. 2017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허무에 의탁한 고독들


해외 문학을 접한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일면 어려움 점이 있다. 그것은 국내 문학과는 달리 독자와 작가 사이에 번역자라고 하는 제 3자가 가교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해외 문학이 자국과는 다른 문학시장에서 제대로된 역량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번역자의 번역 능력이 크게 작용한다.

독자입장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번역가의 작품을 만나느냐는 작가가 창조해낸 그 세계를 훼손없이 온전한 상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된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일수록 어떤 번역가에 의해 번역된 직품을 선택하느냐는 독자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행위이며 이는 반대로 얘기하자면 번역가에게 있어 유명한 작품의 국내번안을 맡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책임의식과 엄중함의 무게가 따르는 일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일본 문학, 특히 일본의 주류 문학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의 명성을 떠나서도 국내에서 이미 한차례 영화화된 전례가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관심도는 클 수밖에 없다.

해외 문학작품들의 국내 번역본들을 여러 권 접했지만, 설국에서 느껴지는 이 기묘함의 양상은 단지 번역가의 문제로 보이진 않는다. 그것은 그 어느 문학가, 소설가와도 구별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만의 특유한 문체 때문이라 나름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특이한 경험은 일반적인 소설 문체에서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일정 부분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장이 끝나야할 것 같은 지점에서 문장이 또 이어지고, 명확한 단락의 구분이 없이 진행되는 서사의 흐름은 어찌 보면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가와바타 특유의 문체성과 소설작법, 그리고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로 쓰여진 소설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단편들이 엮여 자그만치 1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완성된 소설이 바로 이 설국이란 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딱딱 끊어져야할 서사의 흐름이  물줄기처럼 계속 끊임없이 흘러가는 맥락의 이유도 이 때문이라 추론해볼 수 있다.


설국은 이 소설의 내용 그 자체보다 아름다운 회화 한 폭을 보듯 소설의 첫 장, 첫 문장의 강렬함이 독자들에게는 더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이 인상적인 설국의 첫 대목을 자신들의 글에서 인용하는 이들이라해도 설국이란 소설의 내용 자체를 물어보면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지는 의문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이것이 바로 소설 설국의 첫 대목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터널이란 군마 현과 니가타 현의 국경지대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소설 속 무대는 가와바타 자신이 소설을 쓰기 위해 머물렀던 니가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이다.

이 소설 속 눈 덮인 산야와 국경지대, 온천이 있는 여관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사실적인 이유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기승전결의 명확한 서사의 오르내림이 없는 이 소설의 약점의 상당부분은 이런 공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주인공 시마무라의 눈에 포착되는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의 심리변화와 말투, 바뀌어가는 계절의 추이 등에 관한 정밀한 묘사 등으로 채워진다.


온 세상이 눈으로만 빼곡이 덮힌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비현실적이다.

현실 세계에서 국경의 터널을 넘어 비현실적 세계에 당도한 시마무라라는 한 중년 남성의 시선은 이 비현실적 세계를 더듬는 음흉하고도 일정 부분 냉소로 얽룩진 이방인의 그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별한 직업 없이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으로 별 어려움없이,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세상인 유럽의 춤에 대한 관념적 글을 가끔씩 쓰며 살아가는, 주로 산의 매력에 빠져 등산을 즐기는 여행자일 뿐이다.

여행자란 본디 제3자의, 현실세계 안에 뿌리를 두지 않은 이방인의 존재이다. 그의 눈에 비친 고마코와 요코가 하는 일이 모두 다 헛수고로 보이는 이유도 그가 그들의 현실 세계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제3자로서의 거리감 때문이다.

이 소설이 일정 부분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덧없음, 헛 것이라 여기는 그 세계의 허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마다 찾아가는 남자 주인공들의 내면의 유사성 때문이다. 그들은 그 세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찾아 떠나는 이중심리를 보인다.


여관집 주인의 아픈 아들 유키오의 약혼녀- 물론 고마코 자신은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시마무라 시선에 고마코는 그의 약혼녀로 보일 뿐이다- 로서 그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로 나선 17살의 어린 소녀 고마코(시마무라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고마코의 나이는 겨우 19살이다)의 현실 세계는 시마무라의 눈엔 그 자체가 모두 헛수고로 보이는 비현실적 세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낡은 현실 세계 안에서 깨끗한 빛을 발산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요염한 매력을 지닌 어린 게이샤 고마코와 유키오의 새 애인인 요코의 정숙하고도 유키오를 향한 일편단심은 시마무라의 마음을 동시에 뒤흔든다.


그녀들의 지리멸렬한 현실의 허무를 냉소하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 속으로 다가가고 싶은 이런 시마무라의 이중심리는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시선을 빌려 세밀하면서도 내밀하게 묘사된다.

특히 시마무라가 묵는 방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자신의 세계를 열 듯 말 듯 보여주는 게이샤 고마코의 내면은 시마무라에게 던지는 그녀의 대사들을 통해서, 마치 아버지에게 부리는 딸의 어린양처럼 허나 사랑을 갈구하는 고마코의 행동은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시마무라로 인해 현실의 선이 그어진다.

그리고 장결핵으로 젊은 날의 생을 마감하는 유키오의 새 애인 요코는 날마다 죽은 남자의 묘소에 오르고 노래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승화시키는 순진무구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고마코와는 다른 색을 지닌 여성이자 시마무라에겐 또 하나의 비현실적 세계를 상징 한다.

여행자가 떠나온 여행지라는 공간을 현실의 무대로 발 딛고 사는 두 여성에게 그 곳은 가혹한 생의 투쟁지이지만, 이방인 시마무라의 눈에 그곳과 두 여성은 비현실적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게 일편단심 죽은 유키오에게 헌신을 다했음에도 결국 유키오의 죽음과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이 소설의 엔딩에서의 요코의 비극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19살로부터 22살이 되었음에도(이 소설 속에서 시마무라는 3년간 이 온천장을 찾아 고마코를 만난다)아직 4년의 시간을 더 게이샤로서 저당 잡힌 채 살아가야 하는 고마코의 현실은 시마무라의 눈에 헛 수고, 허무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묘사되는 에치코 유자와 온천장 주변의 눈 덮인 이국적 풍경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대로 시마무라가 되게 만든다.

허무를 냉소하면서도 그 헛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고독한 내면의 뿌리가 시마무라의 시선에 의해 면밀히 포착 된다. 고마코와 요코의 고독과 헛 수고는 다름 아닌 시마무라 자신의 것이며 이 소설을 읽는 독자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할 터.

인간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은 채 그 허무한 것들에, 헛 것들의 뿌리에 의지한 채 서 있는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들이다.


일찍이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야 했던 가야바타 야스나리는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죽음마저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가와바타 자신의 절대 고독과 죽음을 향한 집착이 허무와 만나는 지점에서의 냉소가 설국이라는 아름답고도 비현실적인, 그러면서도 명백히 누군가에겐 현실 세계인 그 곳에 뿌리를 내린 인물들의 슬픔이 한 폭의 회화처럼 그려진다.

그것은 시마무라에겐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극히 동떨어진 비현실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그 세계 역시 현실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계라는 역설.


1972년, 자택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세밀한 묘사와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독특한 문체와 만나 그 허무의 세계에 의탁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고독한 내면이 날카롭게 해부된다.그녀들을 보며 헛 수고라 말하는, 국경의 터널을 넘어 그녀들을 찾아나서는 시마무라 역시나 그런 허무와 고독에 기댄 나약한 개인일 뿐.

누군들 이 비정한 허무와 고독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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