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사무소에 부임하고 나서,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부터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아프리카에서는 중장기 차원의 전략과 계획이 있고 없음에 따라 일의 성과에 큰 차이를 보였다. 그걸 알기에 나는 일 년 후에 얻고자 하는 결과를 구체적으로 작성해나갔다.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초등학교 건물을 짓는 일은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성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그렇지만 그중 라디오 교육방송국 설립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지의 방송 환경과 정책, 행정 절차, 사회문화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단시일 내에 라디오 교육방송국을 설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기 프로젝트로서 잔지바르 교육부와 협력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잔지바르 교육부 차원에서 라디오 방송국 운영에 필요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에 필요한 주파수를 분배하고 할당해주는 담당 정부 부처가 달랐다. 그건 잔지바르 방송통신위원회의 소관 업무였다. 아프리카에서 부처 이기주의라는 장벽은 매우 높았다.
잔지바르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고려해볼 때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이 문제 때문에 잔지바르 대통령이 나서서 부처 간 협력을 이끌어 줄 리는 더욱 만무했다. 부처 간의 협조와 조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라서 우리는 준비 일정을 보다 길게 잡고 대응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무소는 1년 전부터 잔지바르 교육부와 함께 주파수 확보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사무소와 잔지바르 교육부는 투트랙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대응하기로 했다. 우리는 라디오 송출을 위한 제반 시설과 장비를 구축하고 교육부는 주파수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는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일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교육부는 주파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잔지바르 방송통신위원회는 계약 기간이 만료된 주파수 하나를 회수하여 교육부에 라디오 방송용으로 할당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교육부도 라디오 주파수를 조만간 확보해서 방송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도 라디오 방송국 개국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있는 곳이 아프리카’라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차일피일하다가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 관련 업무가 계속해서 뒷전으로 미뤄졌다.
어느덧 6개월이라는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교육부 담당 국장도 딱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잔지바르 교육에 혁신을 불러오자’라고 누누이 강조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무성의한 모습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교육부 측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자 교육부 사무실로 담당 국장을 찾아갔다.
“왜 이렇게 주파수 확보가 안 되는 건가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교육부 장관님한테도 보고를 드렸어요. 방송통신위원회 담당 국장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어요. 그리고 긍정적인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조만간 주파수를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오히려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조만간이라고 얘기한 지가 벌써 6개월이 지났어요. 이 프로젝트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잔지바르 사람들을 위한 일이잖아요. 보다 나은 잔지바르의 미래 교육을 위해서 꼭 라디오 교육방송국을 개국하도록 함께 노력해요.”
나는 재차 ‘잔지바르 사람들’과 ‘보다 나은 미래 교육’을 강조해서 말했다.
“교육부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믿고 기다려줘요. 꼭 좋은 소식을 전해줄게요. 인샬라!”
교육부 담당 국장은 언제나 그렇듯 천하태평하게 대답했다.
나는 마냥 교육부 담당 국장의 말과 행동만을 믿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와 별개로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나에게 현지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현지 적응력이 뛰어난 나를 보며 사무소 직원들뿐만 아니라 정부 관계자들도 내게 ‘아프리카화 된 한국인’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에요. 우린 단지 피부색만 다를 뿐이죠. 아마도 우린 같은 조상의 DNA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라고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고는 했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내심 그 말은 진심이었다.
먼저, 교육부 장관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식 절차를 통해 면담을 요청하려면 필요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을 진행하기로 했다. 주변을 수소문해서 교육부 장관이 자주 가는 식당을 알아냈다. 토요일 저녁 시간에 특정 식당에 가면 교육부 장관을 만날 수 있다는 제법 믿을 만한 정보였다.
혼자 가서 기다리면 이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디어센터의 친한 직원과 함께 식당을 방문했다. 식당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현지 음식을 즐기기 위해 몰려든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축구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잔지바르의 이슬람 문화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생경한 모습이었다. 외국인들이 자주 가는 호텔을 제외하고 현지인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술과 담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의 해방구처럼 보였다. 우리도 그들 옆에 자리를 잡고 맥주와 음식을 시켜 TV 속 축구 화면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내가 아는 바로 그 교육부 장관이었다.
‘평상시에는 바빠서 만나기 힘든 장관을 이곳에서 만나는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교육부 장관은 익숙한 듯 함께 온 일행과 지정된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손님들처럼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온 미디어센터 직원이 내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교육부 장관이 이 식당의 주인이래.”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교육부 장관이 식당 주인이라고? 그럼 교육부 장관이 이곳에서 술과 담배를 팔고 있다는 거야?”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잔지바르 교육 철학과 정책에 대해 푸념해 보았자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게 급선무였다. 화장실로 향하는 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연을 가장해서 그에게 다가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장관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인사했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왔어요. 당신은 어쩐 일이에요?”
그가 대답했다.
“친구와 같이 맥주를 한 잔 마시러 왔습니다. 사람이 많고 분위기도 좋아서 그런지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요. 근데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혹시 라디오 교육방송국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그의 민낯을 본 마당에 외교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담당 국장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교육부에서 부통령께도 업무 보고를 드렸어요. 현재 우리 담당 국장이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교육부 장관이 라디오 교육방송국 사업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교육부 담당 국장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부처 차원에서 부통령께 업무 보고를 드렸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라디오 교육방송국 주파수 확보를 꼭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나는 그 이후로도 교육부 장관이 운영하는 식당을 몇 차례 더 방문했다. 갈 때마다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방인이 방문했다는 흔적을 자주 남겨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라디오 교육방송국 설립을 도와줄 만한 영향력 있는 사람을 계속해서 물색했다.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우군들을 많이 확보할수록 사업이 빨리 마무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 교육사업을 수행하면서 사무소에 다방면으로 도움을 준 현지 지인이 한 명 있었다. 잔지바르 케이블방송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둘리였다. 그는 라디오 교육방송국 설립과 관련해서 제도적, 기술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둘리는 사업 운영과 관련해 물심양면으로 내게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에게 라디오 교육방송국 주파수 확보의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둘리가 말문을 열었다.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과 관련해서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내 친구가 한 명 있어.”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진짜? 그 친구가 정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거야? 나는 주파수 문제만 해결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국회의원이야. 내 고등학교 때 친구인데 이번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어.”
둘리를 신뢰했지만 뜬금없이 국회의원이라고 하니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국회의원이라고? 네 친구가 국회의원이라면 우리한테 큰 힘이 되어줄 거 같기는 한대. 암튼 네 친구랑 먼저 약속을 잡고 알려줘.”
큰 기대가 없었기에 그에게 약속을 먼저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에 둘리한테서 연락이 왔다. 국회의원 친구에게 내가 수행하고 있는 교육사업을 미리 설명했고 나와의 약속을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둘리는 국회의원 친구를 만나려면 늦은 밤에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둘리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국회의원을 친한 친구로 두었다고 생각했다.
둘리와 친한 사무소 직원인 이브라힘이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세 명은 밤 10시에 둘리 집에서 모였다. 그리고 둘리의 국회의원 친구가 일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리! 네 친구가 일하는 국회의원 사무실로 가는 거야?”
나는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우린 지금 나이트클럽으로 출발할 거야.”
그의 대답은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이트클럽? 그곳에서 국회의원 의정 활동이 끝나는 거야?”
“아니. 국회의원 친구가 나이트클럽 디제이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에 디제잉을 할 예정인데, 그곳에서 내 친구를 만날 거야.”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일을 경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케냐에서 술 취한 경찰들한테 돈도 빼앗겨봤고 탄자니아 전통시장에서 날치기 강도도 당해봤다. 우간다에서는 범죄 조직에 연루된 밤의 대통령도 만나봤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만나러 나이트클럽을 가는 건 나의 풍부한 상상력으로도 현실화시킬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알고 보니 둘리의 친구는 원래 직업이 나이트클럽 사장이면서 동시에 디제이였다. 전임 국회의원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보궐선거를 치렀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오던 둘리의 친구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자신의 직업을 버리지 않고 밤마다 디제잉을 해왔다. 지역주민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오히려 지지해주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입구에서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한 복장을 한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그 사람이 바로 둘리의 국회의원 친구였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지만 시끄러웠기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클럽 직원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 일행은 디제이 박스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 옆에서 국회의원이 등장했다. 그는 콘솔대로 다가가더니 헤드폰을 집어 들었다. 본격적으로 디제잉을 시작했고 우리는 디제잉하는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는 음반을 바꿔가며 자유자재로 음반의 표면을 긁어갔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따금 우리 쪽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클럽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스크 대신 맥주가 가득한 술잔만이 사람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순간 나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느낌이었다. 클럽 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와 귀청을 찢는 음악 소리가 내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아주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국회의원은 우리가 자신의 디제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 게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둘리한테서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잔지바르 부통령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는데 라디오 교육방송국 관련해서 협조를 요청할게요.”
그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몸이 피곤해서인지 정신이 몽롱해서인지 기억이 도통 나지 않았다. 나는 디제이 국회의원에게 라디오 교육방송의 중요성을 주지 시킨 걸로 만족했다.
이후에도 사무소 직원이 잔지바르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과 회의를 주선하겠다고 했다. 여당 사무총장이 본인의 장모라서 언제든지 미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성과를 지금 당장 얻을 수 없더라도 사무소에서 추진하는 공공사업에 정치인을 노골적으로 개입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열성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서 라디오 교육방송국 개국을 준비했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만나든 지역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추진하는 사업의 목적과 취지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었다.
현지 사정과 환경에 맞춰 인적 네트워크를 쌓다 보니 사업을 수행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다양한 인맥이 사업을 추진해 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순수한 마음과 열정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프리카의 지역사회에서 일할 때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을 많이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