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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Nov 09. 2022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산다

  대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새로운 건물, 시골 지역에 깔린 아스팔트 도로의 광경들을 통해 아프리카의 발전상을 체감한다. 여전히 아프리카는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아프리카는 저개발된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따뜻한 공동체 정신과 끈끈한 유대감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아프리카를 방문하더라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아프리카!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곳이었다. 아프리카는 무거운 삶의 무게로 인해 힘들고 지쳐 있는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앞으로의 방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언제나 그렇듯 세월이 지나도 아프리카는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내가 다시 찾아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괜찮아. 어서 와!’라고 속삭여주는 아프리카의 아량이 좋았다. 그러나 나랑 전혀 다르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프리카는 내 인생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접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또다시 경계심을 풀고 거리를 좁혀나가는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부담감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사랑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미워하지만 멀어질 수 없는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프리카에서 언제나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음식에 적응한다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광활한 아프리카 땅에서 전혀 다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나를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시켜주었다. 뒤돌아보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았다. 아프리카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면서도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곳을 향해 도전을 감행했다. 그 이유에는 한 가지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에도 사람이 산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먼지가 풀풀 나는 흙길을 맨발로 걷고 숲 속의 오두막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것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한 채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아프리카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동아프리카를 살펴보면, 케냐는 사시사철 한국의 가을 같은 기후를 자랑한다. 우간다는 풍부한 토지 자원과 강수량으로 인해 연중 이모작도 가능하다. 대체로 1차 산업 의존도가 높은 농업에 기반한 국가 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 농사를 짓고 살면 자급자족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젊은 사람들은 시골의 삶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특히 시골에서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기회만 있으면 대도시로 떠나려고 한다. 나한테서 차비만을 빌려 도시로 야반도주한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대도시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대도시 속에는 거대한 슬럼가가 형성된다.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화려한 모습 뒤에 숨어있는 낡고 허름한 뒷골목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화려한 호텔 뒤로 우리들만의 세상 이야기가 펼쳐진다.

  혼자의 힘만으로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다. 아는 지인의 안내에 따라 용기를 내어 그곳으로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떼야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내딛는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는 게 느껴진다. 행여라도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젊은 남성들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곳에서 극사실주의적인 아프리카의 양극화를 체험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몇 초 동안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나는 우아하고 화려한 빌딩들이 위용을 과시하는 거리보다 현지 사람들의 낯익은 삶이 묻어나는 뒷골목 풍경을 선호했다. 외국인이 즐비한 관광명소 거리 뒤편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먼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소박하면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허름한 건물과 쓰러져가는 가게들이 즐비했지만 나는 사람 냄새 풍기는 그곳을 좋아했다. 그곳에 가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뒷골목 거리의 매력은 무엇보다 가격경쟁력이었다. 시내에서 파는 똑같은 음식과 물건도 그곳에서는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음식을 먹다 보면 한국의 전통시장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했다. 낯선 공간이지만 그들의 삶 자체도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장면 1     


  나는 외국인들을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식당을 자주 갔다. 흙길 위에 텐트를 쳐서 간이식당을 만들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몇 가지 조리 도구만을 활용하여 현지 음식을 팔고 있었다. 텐트 안으로 불쑥 머리를 들이밀면 그런 나를 보고 현지인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대부분은 놀란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현지 사람들 사이의 좁은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는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나서는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과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는 음식이야말로 내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건강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당 주인과 친해지다 보니 메뉴판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메뉴판에 나와 있지 않은 음식도 언제든지 요청하면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란 프라이를 좋아하는데 자주 가는 단골 식당은 삶은 계란만을 팔았다. 식당 주인에게 계란 프라이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밖에서 계란을 구해와 나를 위해 맞춤형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계란 프라이가 아니었다. 그들과의 동질감, 소속감, 연대 의식을 느끼게 해 준 따뜻한 환대의 음식이었다.


  맞춤형 음식으로는 나의 식탐을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잔지바르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금기 식품으로 규정했다. 김치는 매운 소스로 대체가 가능했으나, 돼지고기를 대체할 만한 음식이 없었다. 평소 삼겹살을 즐겨 먹었기에 불쑥 튀어나오는 돼지고기에 대한 욕망을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무소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던 하마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두려워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사람들 눈을 피해 또 다른 뒷골목 식당으로 이동했다. 우리를 태운 오토바이 택시는 한참을 지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길 끝에 다다랐다. 

뒷골목 식당의 음식에는 삶의 향기가 묻어 있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간판 없는 식당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당 안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누가 볼세라 우리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서는 돼지고기볶음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돼지고기에서는 잡내가 났다. 껍데기에 붙어 있는 돼지털은 제대로 제거가 되지 않았다. 눈으로 음식을 볼 때까지는 차마 입에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음식이 식도를 통과하자마자 온몸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범도 궁하면 가재를 잡아먹듯이 전혀 생각지 않은 음식은 내 미각적 심상을 자극했다. 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곳곳에 위치한 뒷골목 식당들은 나에게 숨겨진 욕망의 식탐 해방구였다.     


#장면 2     


  새로운 음식 문화에 적응을 마칠 때면 언제나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머리카락이 신경을 쓰이게 했다. 반곱슬 머리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두 달 정도만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도 미치광이처럼 보였다. 한국이었다면 노숙자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는 정도였다. 현지의 이발소 위생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웬만하면 집에 있는 일반 가위로 대충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내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저분해졌고 더 이상 방치를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용기를 내어 계란 프라이 식당 옆에 위치한 이발소를 방문했다. 이발소는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우리 직원들에 따르면, 젊은 남자들의 경우에는 보통 2주에 한 번씩 이발소에 가서 이발과 면도 서비스를 받는다고 했다. 우리 직원들이 항상 나보다 깔끔한 용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였다. 


  흥의 민족답게 신나는 음악 소리가 이발소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스피커 상태를 보니 지금 당장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피커는 반쯤 깨진 상태였다. 스피커 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철망은 온데간데없었다.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손님 대기용 소파는 천 덮개가 찢어진 채 내부의 스펀지 내장을 들어내고 있었다. 허리 받침대가 부러져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일반 의자 하나, 곳곳에 폭탄을 맞은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바닥 장판은 분명 창고나 다름없었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네모 모양의 커다란 거울과 하얀 파우더 가루, 미용가위 하나, 이발기 두 개 그리고 헤어 커터칼 만이 이곳이 이발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발소의 내부 모습과 달리 커터칼을 움직이는 이발사의 손동작에서는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손님들 사이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사진 속 남자 모델을 가리키며 똑같은 헤어스타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와 같은 헤어스타일의 머리카락을 잘라본 적이 있나요?”

  노파심에 내가 먼저 이발사에게 물었다. 


  “걱정 마세요. 아랍 친구들도 이발하러 많이 와요.” 

  이발 장인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읽혔다. 이발기를 만지는 이발사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전력 공급이 약해서 그런지 이발기가 자꾸만 내 머리카락을 씹어 삼켰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러졌다. 그런 나를 보며 이발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이발기 대신에 미용가위를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미용가위가 아니라 문방구에서 파는 가위였다. 가위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절삭력이 좋지 않으니 가위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또다시 씹혔다. 나는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발사에게 이발기로 대충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미용 도구를 활용해서는 내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찾을 수 없었다. 이발소 벽면에 붙어 있는 다양한 헤어 모델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헤어스타일을 고집했다가는 편두통으로 먼저 병원에 이송될 판이었다. 그의 실력이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나에게는 지금 당장 고통 없이 이발을 끝내는 게 중요했다. 


  몇 달 동안 손을 대지 못해 지저분하던 내 머리카락은 어느새 아주 깔끔해졌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입영을 앞둔 예비 군인의 헤어스타일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이발사의 손이 움직이는 결에 따라 헤어스타일은 결정 난다.

  ’내 소중한 모발을 조금이라도 남겨준 이발사에게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걸까?‘ 

  이발사의 과감한(?) 손길 덕분에 오히려 한동안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가 없어졌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졌네요. 이제 나도 진정한 아프리카인이 되었어요.”

  나는 그에게 농담을 던졌다. 나도 아프리카인이 되었다는 농담에 그가 활짝 웃었다. 내가 고통을 덜 느끼도록 속도감 있게 이발을 해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머리카락이 자주 씹혀 고통스러운 것 빼고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4천 실링(한화 약 2천 원)으로 단정하게 이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앞으로 당신한테 내 머리카락을 맡기도록 할게요.”

  그렇게 나는 일방적으로 그를 나의 전속 이발사로 임명(?)했다. 머리에서 약간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만 서로의 비슷해진 헤어스타일을 보며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좋았다.    

  

#장면 3


  술을 즐기지 않는 나였지만 가끔씩 주말에 집에서 영화를 시청할 때면 맥주 한 잔이 생각났다. 안줏거리는 언제든 구할 수 있었다. 집 앞에만 나가면 닭꼬치, 피자, 과일, 빵 등을 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머무르는 시내가 아니고서는 캔맥주를 쉽게 살 수 없었다. 


  내가 자주 가는 집 근처 식당은 주류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몰라 지나가는 말로 식당 종업원에게 맥주 파는 곳을 물었다. 그는 바로 옆 모퉁이만 돌면 주류 판매점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가 알려준 곳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주류 판매점을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던 찰나에 승용차 한 대가 갓길에 멈추더니 운전사가 어딘가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건물 외관을 보니 시커먼 시트지가 발라져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몇몇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은 빨간색이 담긴 와인에서부터 갈색빛의 위스키까지 다양한 종류의 술을 팔고 있었다. 상상치도 못한 화려한 라인업의 주류에 압도당했다. 나는 화려함을 뒤로 남겨둔 채 아주 익숙한 모양의 맥주 6개짜리 묶음을 하나 샀다. 주류 가게 종업원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갈색 봉투에 맥주를 담아주었다. 그렇게 한국에서처럼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날까지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슬람 신자가 대부분인 잔지바르에서 돼지고기 음식을 맛보고 맥주를 마실 수 있을 거라고. 


  뒷골목에서 경험한 사례들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바쁘게 움직이는 삶 속에서도 곳곳에 작은 여유들이 숨어있었다. 그 여유를 발견하고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삶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사람 냄새나는 아프리카의 뒷골목 풍경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종종 내가 하는 일에 큰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의도적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뒷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현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음식을 같이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힐링이 되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좋았다. 그들이 영위하는 문화 속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는 생활이 좋았다. 사람 냄새나는 뒷골목의 좁은 길 위에서 마시는 따뜻한 물 한 잔은 그 어떤 호텔에서 마시는 시원한 커피 한 잔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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