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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Jan 15. 2023

운전기사 이브라힘, 최고의 사업책임자로 거듭나다

  사무실에는 항상 일손이 부족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요청한 임무를 제때 처리해 줄 직원이 부재했다. 내 마음속 초침은 큰 소리를 울려대며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었다. 근심거리는 하나씩 쌓여가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오직 앞을 향해서 달려갈 뿐이었다. 제한된 시간에 내가 원하는 일정 정도의 사업 성과를 내는데 필요한 역량 있는 직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탐탁지 않은 사무소 환경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련은 이겨내라고 존재하는 거 아니겠나.’ 누군가가 나를 향해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어떤 개발협력사업이든 간에 아프리카에서 계획된 일정대로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현장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되는 사무소에서 숙련도 높은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사업 기간은 정해져 있다. 천재지변의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주어진 시간 내에 성과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나 경험 있는 인적 자원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경우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내가 주도적으로 모든 일을 도맡아 진행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혼자서 절대적인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기에 육체적으로 피로가 쌓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직원이 중심이 되어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장기간에 걸쳐 직원의 숙련도가 쌓일 때까지 지속적으로 역량을 키워주고 업무 노하우를 전수해줘야 하기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한 사람의 현지 인력이 프로젝트를 도맡아서 진행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 인력의 역량에 따라 사업의 성패 여부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결국 후자의 길을 택했다. 한국에서 쌓은 충분한 프로젝트 관리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실무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싶었다.


  잔지바르 청소년을 미디어 전문가로 양성하는 단기 교육사업이 첫 삽을 뜨지도 못한 채 나를 괴롭혔다. 1년짜리 사업이었지만 그중 절반의 시간이 이미 흘러 버렸다. 현실적으로 나에겐 6개월이라는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사업을 미룰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밖 교육프로그램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우선 사업을 수행할 인력부터 채용하기로 했다. 유사한 프로젝트 관리 경험이 있는 경력자를 중심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면접 참석자들 대부분이 미디어를 잘 안다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 미디어 영상을 제작해 본 경험이 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탄자니아에서 한국의 방송 관계자들과 일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친구를 채용할 수 있었다. 단기간의 영상 제작 경험이 있었지만, 대부분을 운전기사로 일한 친구였다. 그럼에도 미디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인상 깊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나는 신입 직원인 이브라힘에게 해야 할 업무를 설명해 주었다. 

  “이브라힘! 네가 앞으로 담당할 미디어 사업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줄게. 우선 미디어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을 선발해서 미디어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이야. 선발된 친구들이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 돼. 그러고 나서 이들이 제작한 영상 콘텐츠를 가지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특별상영전을 개최하는 거지. 이 모든 걸 6개월 안에 끝마치면 우리의 임무는 완성이 되는 거야.” 


  “영상 제작 경험이 저에겐 그리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아요. 사업이 잘 마무리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볼게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이브라힘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똘망똘망한 눈빛, 환한 웃음, 거침없이 위아래로 끄덕이는 고개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힘을 모아 우리 다 같이 사업을 멋지게 성공시켜 보자.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기존 자료를 참고해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미디어 교육프로그램 일정표를 하나 만들어보도록 해. 그러고 나서, 추후 일정을 논의하도록 하자.”

  나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그를 향해 말했다. 잊으려 노력해 봐도 인력을 채용할 때마다 실망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젊은 친구들의 지나친 자신감에 배신(?)당한 기억이었다. 이브라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역설적으로 나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행여 그가 나를 실망시키더라도 다른 사람을 채용할 수는 없었다. 그를 믿고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곧 사업의 실패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처럼 집에서 달콤한 주말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갈 무렵, 시끄러운 핸드폰 벨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뚫고 울리기 시작했다. 그 벨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브라힘이었다. 


  “여보세요! 이브라힘! 주말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니?”

  내가 전화를 받았다.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뒤편에 내려앉은 불안한 마음은 애써 감추려 노력했다.


  “주말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혹시 이따가 점심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이브라힘은 언제나 그렇듯 아주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이따가 1시간 후에 잔지바르 여객터미널 옆에 있는 치킨집에서 만나도록 하자.”

  가끔씩 주말이면 직원들을 현지 식당으로 초대하여 같이 점심을 먹고는 했다.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하지 못한 담소를 나누며 직원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해 가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주말에 직원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내 예상이 기우이기를 바라며 식당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이브라힘 모습

  식당에 가까워지니, 저 멀리서부터 이브라힘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바비큐 통닭 한 마리와 음료수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간중간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관찰했다. 그의 입에서 ’그만두겠다‘라는 말만 안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브라힘! 무슨 일이길래 갑자기 주말에 나를 만나자고 한 거니?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집에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한 가지 개인적인 고민이 있어서 상담을 드리려고요.”

  그가 운을 뗐다.


  “고민이 있다고?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그래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혼자서 사업을 수행해 나갈 자신이 없어요. 영상 편집 및 제작을 조금 맡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외부 손님들을 차로 모시고 일정을 진행하는 일은 자신이 있는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 거 같아요. 도저히 못 하겠어요.”


  이브라힘은 입사한 지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업무 포기를 선언했다.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내심 많은 걸 기대했던 직원이었는데 나에게 또다시 시련이 주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때마침 도착한 음식이 짧지만 긴 우리의 침묵을 깨 주었다. 


  잔지바르 청소년들을 위한 미디어 사업이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새로운 사람을 채용할 물리적인 시간조차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애당초에 또 다른 인력 채용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와 동행이 되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브라힘! 하나만 물어볼게. 이전 사무실에서 모범 운전기사라고 했잖아. 한번 생각해 보자. 처음부터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 너는 운전대를 잡자마자 모범 운전기사가 되었니?”


  이브라힘이 현재 느끼고 있는 부담감을 덜어주는 게 중요했다. 나는 운전 연습을 예로 들며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아니요. 운전을 계속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어요.”


  “처음에는 너도 누군가로부터 운전을 배웠을 거야. 운전을 계속하면서 운전 실력을 쌓아간 거지. 결국에는 아주 훌륭한 운전기사가 되었잖아. 이번 사업도 운전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너 혼자 일하는 게 아니야. 지금부터 내가 하나씩 일을 가르쳐주도록 할게. 내가 알려주는 대로 같이 일하다 보면 너는 어느 순간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하나의 팀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갔다. 그를 향한 애정 어린 조언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향한 따끔한 충고이기도 했다. 바쁠수록 주변 사람들을 더욱 세심히 챙겼어야 했지만, 그에게 일방적인 지시만을 내렸을 뿐이었다.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잘 알겠어요. 함께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이브라힘은 특유의 해맑은 웃음과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의 선천적인 낙천성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주눅이 들었다가도 금세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장점을 가진 친구였다. 

이브라힘은 매사에 열심히 일하면서도 절대로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마침 사무소에는 한국인 자원활동가 한 명이 일하고 있었다. 자원활동가와 이브라힘이 한 팀을 구성해서 사업을 수행하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상대적으로 부담감을 덜 느끼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브라힘을 볼 때마다 나의 초창기 직장인 시절이 떠올랐다. 입사해서 문서 작업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과거의 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필요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 팀 전체에 민폐를 끼칠 때도 많았다.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그들은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나를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이브라힘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는 지난날의 내 모습을 떠올려주었고 동시에 현지 직원들의 성장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직원들을 성장시켜 나갔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상부에서 시키는 일만 하던 직원들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사업의 전반적인 얼개를 이해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처음엔 직원들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부적인 부분은 직원들이 직접 계속해서 채워나가도록 기회를 부여했다.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지 않는 이상 눈에 보이는 실수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줬다. 


  나는 한 가지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직원들이 조금씩 성취감을 맛보기 시작하면 일하는 재미도 느끼고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나가면서 크게 성장하리라는 것을. 


  이브라힘에게 워크숍에 참석하는 교육생용 단체티를 제작하도록 요청했다. 그가 티셔츠 디자인 시안을 가져왔다. 왼쪽 가슴 부분에 적혀 있는 슬로건 글씨가 티셔츠 색깔과 비슷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티셔츠를 제작하고 나면 육안으로 슬로건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체티가 사업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었기에 알아서 진행하라고 했다. 


  이브라힘이 프린팅이 끝난 단체티 샘플을 하나 가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단체티를 나한테 보여주는데 연방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브라힘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티셔츠에 적힌 글씨체가 작은 데다가 티셔츠 색깔과 비슷해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브라힘! 너의 첫 번째 작품을 만드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어. 네가 보기에도 단체티가 조금은 이상하게 제작되었지? 무슨 문제인지 네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 얘기해 봐.”

  내 생각을 알려주기에 앞서 그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미디어 사업의 슬로건 문구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아요. 글씨 크기가 작은 데다가, 글씨 색깔마저 티셔츠 색깔과 너무 비슷해요. 미디어 사업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디자인 콘셉트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이브라힘이 자신의 생각을 공유했다. 그는 단체티 제작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명확하게 짚어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노력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할애하여 이브라힘에게 사업 보고서 작성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다양한 종류의 보고서 샘플과 동영상 파일을 공유해 주었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일이다 보니, 그는 보고서 작성에 애를 먹었다. 그가 보고서를 가져올 때마다 문서 양식, 작성 내용 등 많은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주었다.


  특히 사업 경험이 부족했던 이브라힘에게는 이미지트레이닝을 자주 연습시켰다. 현장의 모습을 그려가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도록 했다. 대규모 행사를 준비할 때는 필요한 준비 물품을 정리하고 행사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틈나는 대로 리허설을 시켰다. 워크숍이나 외부행사에서는 사회자 역할까지 담당하게 했다. 


  내가 이끄는 대로 군말하지 않고 잘 따라오는 그가 대견했다. 가끔씩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연습과 실전을 거듭할수록 그는 아마추어의 티를 벗고 완벽에 가까운 사업책임자로 태어나고 있었다. 

이브라힘은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은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는 자발적으로 다음 단계에 진행해야 할 일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모습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련의 활동을 완벽하게 해내었다. 내가 알던 예전의 이브라힘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는 내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직원으로 거듭났다. 내가 실수로 놓치는 부분까지 챙길 정도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야말로 미운 오리 새끼에서 멋진 백조로 성장했다. 


  이브라힘은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동안 내게 가장 큰 보람과 뿌듯함을 안겨준 직원이었다. 되돌아보면 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은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브라힘이야말로 내 마음속 물음표를 확실하게 마침표로 정리해 준 친구였다. 이브라힘의 성장 이야기는 어쩌면 아프리카인에 대한 편견 너머에 존재하는, 내가 꼭 보여주고 싶었던 희망 이야기이기도 했다. 먼 훗날 수많은 이브라힘을 만들어내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쿠펜다(사랑해)! 이브라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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