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 어느 뜨거운 여름 오후, 6명의 마흔다섯 살 아줌마들은 드디어 환락의 섬, 이비자에 도착했다. 전날, 아니 당일 아침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열흘 치 음식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아이 픽업을 맡기고, 남편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회사업무를 조율하고…. 짐쌀 여유도 없었지만 여권만 챙기면 된다는 삶의 여유는 있었다. 나이에서 오는 짬바였다.
공항도착 후에도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항공권 비용을 아끼느라 경유지인 독일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한참을 대기했고(덕분에 시작은 독일 맥주와 함께!), 늦은 밤 바르셀로나에 도착, 두 팀으로 나누어 택시를 타고 공항 근처 저렴한 호텔로 이동, 야전침대 같은 2층 침대에서 취침, 다음날 아침 국내선 공항으로 또 이동, 비행기 연착, 다시 대기, 이비자 도착 후 다시 두 팀으로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 연락을 받지 않는 에어비앤비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림…
시작부터 고생길이 열렸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과 흥분으로 모든 상황에서도 신이 났다. 집 떠난 지 하루가 넘도록 공항 근처를 벗어나지 못해 혹시 공항투어 온 거냐며 킥킥댔고, 택시가 목적지를 못 찾아 헤매도 서로 너 때문에 재수 없는 거라며 놀려댔다. 함께할 룸메이트를 정하는 가위바위보에 목숨을 걸며 뭐가 그리 재밌다고 배꼽 빠지게 웃어댔다. 여기엔 회사 사람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는 동네 엄마도, 아들과 딸도 없었다!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르 웃는다던 15살에 만나 45살이 된 우리는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그때 그 시절의 홀가분한 명랑 또라이들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춤추기 위해 전 세계인이 몰려드는 이비자가 아니던가! 완벽한 일탈의 장소였다.
이비자 바닷가의 상큼한 에어비앤비
뜨거운 섬 이비자의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눈부시고… 우리의 손톱, 발톱은 비행기에서 붙인 젤네일로 알록달록했고, 손에는 각자의 별자리를 딴 우정반지가 끼워져 블링블링했다. J(나)의 작품이었다. 이번여행의 가이드를 자처한 J는 (MBTI도 파워 J이다) 모든 스케줄과 소품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며 몇 달을 준비했다. 하루 한 번씩 총 4번의 클럽 일정(제일 핫한 곳으로)을 알차게 구성해 고객들에게 프레젠테이션했고, 친구들이 변변한 클럽의상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갖고 있던 모든 액세서리와 희한한 옷들을 바리바리 싸왔다. 손톱 발톱을 위한 젤네일 램프부터 뜨거운 햇빛을 피할 선크림, 지친 피부를 위한 마스크팩, 도난방지용품, 에너지를 짜내가며 놀기 위한 홍삼, 안주가 될 하몽 등등 J의 캐리어는 공금으로 산 물건들로 가득 채워졌지만 얼마를 썼는지 계산은 잘하지 못했다.
어렵게 숙소 주인과 연락이 되어 드디어 짐을 풀 수 있었다. 이비자의 7, 8월은 최성수기로 모든 객실이 몇 달 전부터 만실이다. 우리는 1년 전 비행기 예매와 함께 방 3개짜리 숙소로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다. 누군가는 못 올 줄 알았는데 6명 모두 함께 오게 될 줄이야! 역시 손해 본다는 데 장사가 없다. 숙소는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화사하고 아기자기했다. 컬러풀한 소품들이 잘 어울리는 신나고 뜨거운 나라 스페인다웠다. 방에 대충 짐을 던져놓고 스페인 술 까바(샴페인이랑 비슷하지만 훨씬 혜자로운 가볍고 상큼한 스파클링 와인)부터 땄다. 뽀그르르 거품이 올라오는 시원한 까바 한 모금에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 하나 둘 식탁에 모여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 맡은 K의 방귀냄새 얘기며, Y의 술주정 녹취, 각자 여행오기까지의 험난한 에피소드… 30년 묵은 친구들의 수다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빨리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
“이제 자자! ”
9시쯤 L의 한마디에 모두들 얌전히 기상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당이 과반수를 넘어 평소 같으면 첫날부터 술로 끝장을 봤을 우리였지만 다음날 매우 매우 일찍 일어나야 했다. 기상알람은… 0시에 울렸다! (이보다 일찍 일어날 수는 없다) 뜨거운 낮에는 시에스타를 즐기고 시원한 밤부터 놀기 시작하는 스페인은 클럽의 피크시간도 새벽 3-6시라고 했다. 45살에게 매우 험난한 일정이었다. 어쨌든… 와… 우리가 드디어 이비자 클럽에 가는 거야?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주로 J가 싸들고온 액서사리들
서로 코디해 주고 반짝이를 붙이고, 간만에 입는 원피스 자크가 잠기지 않는다며 좌절하고, 이 옷 입었다 저 옷 입었다, 머리를 풀렀다 묶었다 난리가 났다. 마치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무 살에 처음 나이트클럽에 갈 때와 같은 설레임이었다. 언제 이렇게 나를 과감히 꾸미고 놀러 갔던 건지… 너무 오랜만이라 서툴고 낯설고 흥미진진했다. 1시간의 신나는 꽃단장을 마치고 나와 건물 1층에 있던 피자집에서 간단하게 와인 2병으로 예열을 했다. 모두들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 잘 놀 수 있겠지? 밤새 섬을 도는 클럽 전용 버스를 타고 새벽 3시쯤 드디어 첫 클럽, 파차에 입성했다!
첫클럽 파차에서 한껏 꾸미고 한 컷
파차는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핫한 클럽이라 했다. 버스를 내리자 멀리서부터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에 우리 심장도 쿵쿵대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는 너무 어려서 긴장됐다면 마흔다섯 살에는 너무 늙어서 긴장이 됐다. 한국에서의 클럽은 마약, 헌팅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젊음, 멋진 몸매와 섹시한 의상이 필수인… 우리 같은 아줌마들에겐 금단의 영역이 된 곳이 아니던가? 우리 너무 주책 아닐까? 너무 뚱뚱한 거 아닐까? 이런 곳에서 놀기엔 너무 늙은 건 아닐까? 조심히 발을 들인 클럽 안은 전 세계에서 놀러 온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우리는 입장료에 포함된 술을 한잔씩 받아 들고 포토존에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파차의 아이콘 체리 모양패턴으로 꾸며져 있었다. 기자들은 없지만 스타가 된 것처럼 신났다.
파차는 두 개의 공간이 있었다. 좀 넓은 방과 작은 방. 작은 방에선 뭔가 컨트리 음악 같은 옛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큰 방은 EDM이 빵빵 울려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 든 사람, 뚱뚱한 사람, 가볍게 입고 온 사람, 정말 희한하게 입은 사람, 제각각의 다양한 인종과 나이대의 관광객들이 한데 모여 서로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각자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클럽 안은 너무나 깜깜해서... 우리가 신경 쓴 의상도, 우리의 허물어진 몸매도, 우리의 어설픈 춤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첫 클럽에서 모든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냥 즐기면 될 뿐이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인다 ㅋㅋ
두어 시간 신나게 흔들고 나자 지치기 시작했지만 너무 신나 더 놀고 싶다는 저질체력 K의 요구로 새벽 6시까지 모두 힘을 짜내 즐겼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P와 K, L은 쓰러져 잠이 들고 흥이 남은 J와 Y, G는 와인 한 병과 플라스틱잔을 들고 숙소 앞 해변으로 나가 동이 터오는 걸 보며 여운을 즐겼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