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오늘 문득 '희망가'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그러네. 정말 이 풍진 세상인 거 같아. 별의 별일이 다 있잖아."
굳이 인생 전체가 아닌 올 한 해만 돌아봐도 정말 이 풍진 세상이었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돌아봐도 참으로 풍진 세상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왜 그렇게 우리의 직장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일까.
풍진세상(風塵世上): 편안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
'이 풍진 세상'처럼 직장 역시 '이 풍진 직장'이다. 편안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일들의 연속이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얼마 전에 커뮤니티에서 만나 끈끈하게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8명이서 줌으로 송년회를 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췄고 실력도 인정받지만 사는 얘기를 들어보니 한 해 동안 다들 치열하게 살았다. 겉으로 볼 때는 큰 어려움 없이 산 거 같은데 깊은 얘기를 나눠보니 어려운 일도 많았고, 인생의 기로에 서 있기도 했고, 몸과 마음을 다쳐 고생하기도 많이 했다. 송년회 자리에서 서로를 향해 웃기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 각자의 피, 땀, 눈물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이런 모양이 일상인 우리네 삶 가운데 '희망가'를 듣노라니 왠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직장
아침에 좋은 일이 생겨도 오후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어 맘 편히 기뻐할 수 없는 직장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을 얻어도 그것으로 진정한 가치를 얻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직장
희망은 늘 품지만 희망이 밥 먹여주지 않는 직장
앞을 향해 달려가지만 가끔 뒤돌아보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 직장
이렇듯 이 풍진 세상의 축소판인 직장에서 우리는 체념하듯 살아야 할까?
아니면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을 믿는 학생들이 없는 것처럼, '직장 생활이 제일 편해요'라는 말을 믿는 직장인도 없다. 그럼에도 우린 '나만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라고 늘 고민한다. 후배 중에도 이렇게 묻는 이들이 많다.
"마크, 이러는 내가 이상한 걸까요?"
내 직장 생활이 어려움에 처하면 희한하게도 나를 제외하고 다들 직장 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만 유독 힘들어하는 것 같아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보인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후배한테 늘 얘기한다. 아니라고, 나도 힘들다고, 그리고 네가 힘든 것처럼 네 옆 사람도 힘들어한다고 말이다.
직장 생활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수만 가지 이유 중에 굳이 하나를 꼽자면 바로 '기대치'이다.
1. 회사가 나에게 원하는, 내가 회사에 원하는 기대치
2. 리더가 나에게 원하는, 내가 리더에게 원하는 기대치
3. 동료가 나에게 원하는, 내가 동료에게 원하는 기대치
이 기대치 중에 무엇 하나만 어긋나도 자신이 불편하다. 예를 들어 '내가 리더에게 원하는 기대치'가 있는데 그것이 늘 충족되지 않고 실망감만 가득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면 아무리 본인 역할을 잘 해내더라도 직장은 불편한 곳이 된다. 그리고 '동료가 나에게 원하는 기대치'로 인해 부담을 느끼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자신의 현재 모습은 80% 수준인데 동료들이 당장에 100% 수준을 원한다면 나머지 20%를 채울 수 없는 자신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차이는 단시간 내에 줄어드는 것이 아니어서 고질적인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기대치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관찰보다는 대화'이다. 우리는 기대치에 대해서 '관찰'을 많이 한다. 앞에서 말한 경우를 예로 들면 리더가 내가 원하는 기대치에 충족하는 지를 관찰하고, 기대치에 못 미치는 나를 바라보는 동료의 시선을 관찰한다. 하지만 대화를 할 경우 기대치를 관리할 수 있게 된다.
팀장: 이번 프로젝트 복기를 좀 해볼까요?
마크: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얻은 점이 있다면... 그리고 실수를 통해서 배운 점은....
팀장: 고생했지만 그래도 소기의 성과를 이뤄서 팀원들에게 고마워요.
마크: 팀장님, 한 가지 건의드려도 될지요?
팀장: 말해보세요.
마크: 이번 프로젝트 중간에 팀원들이 고객사와 협의한 내용에 대해 팀장님이 수정한 일이 두어 번 있었는데요. 팀원들이 부족하더라도 협의해서 결정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음 프로젝트부터는 가능하면 수정하는 일 없이 진행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팀장: 음, 그렇지 않아도 A 매니저도 비슷한 얘기를 내게 했는데 한 사람만의 의견이 아닌걸 보니 나로서도 반영을 하도록 노력해야겠네요.
물론 상황이 늘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시도를 하는 것이 좋다. 기대치를 관리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현실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풍진 직장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아무도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저녁 시간에 집 근처 카페에 가면 퇴근 후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떠는 직장인들을 본다. 하도 큰 목소리로 대화하다 보니 꽤 떨어져 있는데도 대화 내용이 들리는데 대부분 직장 뒷담화 이야기이다. 이처럼 퇴근 후 친구와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끔 만나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는 회사에서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풍진 직장에서 가끔 도움되는 존재보다 힘들 때마다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주고 토닥여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는 그 한 사람을 찾기가, 만나기가 꽤나 힘들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직장 내에서 아무도 나의 힘듦을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힘들다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는 데도 주위에서는 나에게 늘 요구하고 바라고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그걸 또 충족시키기 위해서 앞만 보고 직장 생활을 해나간다.
아무도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직장인들이 하는 행동이 있다.
업데이트하지 않았던 이력서를 꺼내보기
한동안 연락하지 않은 입사 동기나 친구들 근황 체크하기
통장 잔고 확인하기
대학원 알아보기
가족에게 '나 회사 잠깐 쉬어도 될까?'라고 장난스럽게 말 건네기
그리고 다시 내일이 찾아오고 기댈 언덕, 피할 우산이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들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만들고 얘기를 하기보다는 얘기를 하다 보면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이 용기를 내야 한다. 너무 사람을 가리기보다는 주변 사람에게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털어놓는다면 그들 중에 깊이 공감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제보단 오늘의 내가, 오늘보단 내일의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장 생활이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성장과 편안함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유가 뭘까?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변수 하나하나가 강력하다 보니 편해질 거라는 기대는 희망사항과 같은 머나먼 얘기이다.
친한 선배 중에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늘 좋은 성과를 내는 선배가 있다. 인품도 좋아서 사내에서 여러 사람이 따르고 사내 동호회도 이끌고 있다. 그런데 이 선배는 당장 내일이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바로 본인을 항상 구박하고 함부로 대하는 영업팀장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났더니 내년에도 같은 팀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며 절망했다. 선배의 내년은 영업 실적과 별개로 이 풍진 직장일 것이다.
또한 나의 자세가 바뀐다고 해서 고객이 바뀌진 않는다. 흔한 표현으로 어뷰징(abusing), 즉 갑질이 심한 고객들이 있다. 프로젝트 범위가 A부터 C까지인데 프로젝트 도중 스멀스멀 D를 해달라 하고 F를 해달라 한다. 단칼에 거절하면 좋으련만 내년에도 함께 일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달라진다 해도 바뀌지 않는 고객으로 인해 늘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이런 고민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해결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봤던 것이 바로 투 트랙 (Two-track) 전략이다. 나의 성장과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장을 통한 기쁨은 그것대로 누리고, 해결되지 않는 상황은 계속해서 숙제로 받아들이고 마주하는 것이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 두 가지를 분리해내면 이전보다 입는 상처가 덜해진다.
오늘의 수고가 내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다. 내가 오늘 이렇게 마음고생했는데 내일은 다시 리셋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떴듯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직장 생활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오늘의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더라도 오늘 하루를 마치기 전에 우선 일단락하자. 즉, 오늘 받을 불편함과 어려움은 오늘 다 받고, 내일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 순 없지만 그래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다. 마치 산불이 났을 때 불씨를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듯이 말이다.
이 부분은 특히 책임감의 무게가 큰 프로젝트 매니저(PM)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프로젝트의 일정, 산출물 품질, 커뮤니케이션 등 모든 것들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는 포지션이 바로 프로젝트 매니저이다. 만약 오늘 고객에게 전달한 산출물의 품질에 문제가 생겼다고 가정해보면, PM의 하루는 정말 화장실 다녀올 시간도 없이 바쁠 것이다. 당장 하루 만에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오늘의 수고는 오늘로 충분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오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정리하고 그것을 끝내고 퇴근하는 것이다. 만약 오늘 해야 할 일이 원인 분석과 그에 따른 새로운 방향 설정이라고 한다면 거기까지 해내고 퇴근하는 것이다. 내일 할 일이 남았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을 줄 알아야 긴 호흡으로 프로젝트 매니저 직무를 감당할 수가 있다.
이렇듯 이 풍진 직장에서도 희망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오히려 더 기를 써서라도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흔히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이 사람이다.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1년, 2년을 놓고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10년을 두고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내 경우 철부지 같던 후배가 1년 만에 환골탈태해서 프로젝트 매니저급으로 성장한 걸 경험했다. '쟤는 왜 우리 회사에 남아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쟤는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야'라고 바뀌는 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참 복합적이다. 원래 괜찮은 직원이었는데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고, 1년 동안 회사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절한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잘했으면 하는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봤을 때의 기쁨은 상당했다.
직장이 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의 희망이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첫 회사에서 유이한 남자 팀원이었던 후배의 희망은 파일럿이었다. 참 특이했다. 데이터를 다루는 친구였는데 그의 희망은 늘 파일럿이었다. 주말이나 휴가를 활용해 관련 자격증을 공부하더니 결국 5년 후 비행훈련원에 입학했고 몇 년 뒤 파일럿이 되었다. 이 후배에게 고마운 건 회사에서도 프로 정신을 발휘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그에게도 풍진 직장이었다. 특히 직급이 낮다 보니 주변에서 업무 협조를 제때 해주지 않아서 서러움이 컸다. 나에게는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업무에 차질이 발생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불편하다.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오늘도 아등바등이다. 나의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사치가 아니며 작은 변화를 바라보는 즐거움 또한 있는 곳이다. 이 풍진 직장을 만난 모든 직장인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