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노멀 시대에도 노멀해야 하는 것
2020년 9월 9일 이른 6시.
컨설팅회사 임원 마크는 여느 때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힘들게 잠에서 깼다. 머리가 살짝 지끈한 걸 느끼며 어젯밤 고객사 임원인 매튜와의 저녁 자리가 떠올랐다. 고객이면서 30년 지기 친구이기도 한 그와 개인적으로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코리아타운 한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집 근처 단골 와인바에 들러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니 자정을 훌쩍 넘겨 집에 들어왔다.
마크는 시원한 얼음물 한잔을 비우고 여느 때처럼 서재 PC를 켰다. 밤새 올라온 뉴스를 확인하고 아시아 지사에서 날아온 중요하진 않지만 꼭 회신해야 하는 메일들을 처리하는 시간이다. 즐겨찾기에 저장된 뉴욕타임스 사이트에 가장 먼저 접속했다. 최근 웹사이트를 개편한 뉴욕타임스는 애니메이션 기능을 섞어 기사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로 메인 화면이 떴다. '어?' 순간 눈을 의심했다.
"뭐지?" 당황한 마크는 무의식적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아니, 이게 대체?"
뉴욕타임스 메인 화면 사진에는 어젯밤 와인바를 나오면서 마크가 회사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사진 위 헤드라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A컨설팅사 임원, 법인카드 유용
기사에는 어제 식사 자리에서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마크 머릿속엔 어제 식사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고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고객사 임원과 업무 목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적정 금액을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는 고객사 임원 매튜를 업무상으로 만난 자리가 아니라 온전히 친구로서 만난 자리였다. '어떻게 하지?' 마크는 잠깐 망설였지만 어찌 됐든 고객사를 만난 자리인 데다 회사 돌아가는 얘기도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법인카드로 결제했다.
"오 마이 갓!"
정신을 차린 마크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새벽에 배달된 뉴욕타임스 신문을 펼쳐 들었다. 부질없는 바람이었던 걸까? 뉴욕타임스 1면 톱기사엔 방금 전 PC 화면에서 봤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진 않았을 텐데'
MBA 필수 과목 중 하나가 <Organizational Behavior, 조직행동론>이었다. 케이스 스터디 때마다 여러 갈등 상황이 주어졌는데 서로 다른 환경, 다른 국가에서 자란 동기들은 매번 서로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하산 도중 대원 한 명이 중상을 입는다. 두고 내려가면 나머지 대원들은 생존 가능성이 높은 반면, 데리고 하산하면 모든 대원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동기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친 대원을 놓고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이 조직행동론에서 큰 파트 중 하나가 바로 기업윤리, 윤리경영이었다. 나는 '윤리는 재미없다'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윤리' 과목 영향이 컸던 거 같다. 윤리라는 것이 수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는데, 세월이 흘러 MBA에 와서도 윤리를 배우고 있으니 고리타분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윤리적인 부분이 개인의 삶뿐 아니라 직장 생활의 기초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평소에는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기업의 미래와 개인의 직장 생활 모두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이 또한 윤리적인 부분이다. 그러기에 MBA에서도 필수 과목이지 않을까 싶다.
경험상 회사는 때로는 조금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윤리적인 부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른 철저한 프로세스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골든 룰이 하나 있다.
바로 '뉴욕타임스 룰'이다.
직장 내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또는 검은 유혹에 노출될 때가 있다. '뉴욕타임스 룰'은 이때 활용하는 것으로 본인의 결정과 행동이 다음 날 뉴욕타임스 1면 기사에 실렸을 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 컨설팅사 임원 마크가 놓은 상황도 마찬가지다. '친구 매튜'와 '고객사 임원 매튜' 사이에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으로 행동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만약 마크가 '뉴욕타임스 룰'을 적용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명확해진다. 직장 내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뉴욕타임스 룰'은 골든 룰과 같이 여겨진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잃는 것도 많은 법, '뉴욕타임스 룰'만 지킨다면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그런데 비단 마크의 사례뿐 아니라 '뉴욕타임스 룰'을 적용할 수 있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 보상심리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첫 회사에 입사했을 선배들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마크, 회사 다니는 동안 개인 카드는 쓸 일이 없으니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돼요" 무슨 얘긴가 했더니 법인카드를 큰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부서마다 차이가 있지만 식대, 시간외식대, 교제비 등의 명목으로 팀별 예산이 있었고, 예산 내에서는 큰 제약 없이 사용했다. 심지어 점심시간에 다른 부서 직원과 식사를 해도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품의를 올릴 때 목적란에 '사내 커뮤니케이션 강화'라고 쓰면 됐다. 선배들처럼 나 역시 그랬지만 가끔은 고개가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계속 그랬던 것은 '보상심리' 때문이었다. 첫 회사의 평균 연봉은 회사 규모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연봉 인상률도 낮은 탓에 직원들의 사기가 꺾여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법인카드를 편하게 사용하면서 이를 낮은 연봉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동기들과 이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이렇게 팀별로 지나치게 배정된 예산을 줄이고 그 돈으로 우리 연봉 올려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회사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에 대한 보상심리가 생긴다. 그리고 이 보상심리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가 생긴다. 회사 입장에서도 큰 리스크 요인이다. 따라서 직원들의 불만의 원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보상심리로 인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컴플라이언스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실제로 컴플라이언스로 유명한 독일계 회사로 갔더니 얼마나 법인카드 사용 규제가 심한지, 너무 규제가 많아 직원들이 어지간해선 법인카드 쓰지 않더라.
마음속에서 보상심리가 작동하면, '뉴욕타임스 룰'을 떠올리자. 내일 아침 신문 1면 기사에 내 행동이 실렸을 때 기사를 읽는 이들이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동일지 생각하고 행동해보자.
둘. 익숙한 감시에서 벗어났을 때 판단력이 흐려진다
두 번째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처음 도입했을 때 일이다. CFO가 밀어붙여 제도를 도입했지만 대부분 팀장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재택근무에 대한 공감대 형성, 장점에 대한 교육 없이 진행되다 보니 팀장의 역량에 따라서 도입 여부, 정착 여부가 갈렸다. 몇 번 시도해보고는 팀장이 답답해서 포기하기도 했다. 많은 팀장들은 팀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 본인들이 팀장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반면에 팀원들도 마음가짐이 준비되지 않다 보니 재택근무를 마치 휴가처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자, 그런데 이제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전면적 또는 부분적인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일부 공무원들이 재택근무 기간 동안 근태 관리가 잘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공무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회사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스타트업과 같이 자율적인 근무가 몸에 익숙한 회사를 제외한 일반적인 회사는 출근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유연 근무제를 하더라도 하루에 또는 한주 동안 정해진 시간을 근무해야 한다. 하지만 재택근무는 이 모든 것이 실상 무용지물이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재택을 할 경우 사내 메신저를 무조건 활성화해야 했고, 이를 알리는 초록불이 꺼져 있으면 안 됐다. 일부 회사와 공공기관의 경우 출퇴근 프로그램을 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을 도입하더라도 CCTV로 일하는 모습을 생중계하지 않는 한 마이크로 매니징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우리는 감시라는 것에 익숙했다. 임원들은 팀장을 감시하고, 팀장은 팀원을 감시하는 구조였다. 반대로 팀원들도 그런 감시에 익숙해졌고 어느 정도의 감시가 있을 때 더 열심히 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택근무에는 감시가 없다. 다만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감시를 벗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해방감이 주는 역효과를 조심해야 한다. 마치 부모님 집을 떠나 대학에 들어와 자취 생활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택근무 요령도 '뉴욕타임스 룰'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재택근무도 엄연히 회사의 영역이다. 내 오늘 하루가 내일 신문 1면 기사 또는 뉴스 포털 메인에 떴을 때 떳떳할 수 있도록 해보자.
셋. 직급에 따른 특혜가 판단력 저하를 불러온다
첫 번째 회사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연봉도, 연봉 인상률도 모든 것이 평균 이하였다. 현재 입사 동기 중에 10%만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었는데 내가 봐도 정말 똑똑해 보이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이직 생각하지 않고, 불합리한 것도 견뎌내면서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바로 임원이었다. 임원이 되려면 최소 20년 이상을 회사 충성해야 했는데, 10년 정도 지나면 지난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나갈 수가 없었다. 특히 국내 회사는 직급에 따른 혜택의 차이가 크다. 팀장만 돼도 팀 예산에 대한 전권이 주어진다. 예산이 많은 팀의 경우 팀장 승인만으로 쓸 수 있는 돈이 연간 수천만에 이른다. 최근엔 고과와 상관없이 팀장이란 타이틀만으로 매년 수천만 원의 인센티브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임원이 되면 어떨까? 법인 차량이 제공되고 다룰 수 있는 예산의 규모는 억 단위가 된다. 고위 임원이 되면 어떨까? 고위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이 로비 직원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 임원실과 비서가 배정되고 본인이 맡은 사업부에서는 거의 왕과 같은 권력을 누릴 수 있다.
두 번째 회사는 외국계여서 특혜는 많았지만 임원에 대한 의전은 훨씬 덜한 편이었다. 확실히 외국계다 보니 기본 연봉보다 평가와 연동되는 엄청난 인센티브가 큰 매력이었다. 참고로 마지막으로 이직한 스타트업의 경우 직급에 따른 특혜는 거의 없는 편이다. 스타트업 문화에 특혜를 바랐다간 되려 창피를 당하기 십상이다.
특혜는 왜 판단력 저하를 불러올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특혜를 받으면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 같다. 골프를 좋아했던 홍보팀장은 기자와 만난다는 명목하게 팀 교제비 예산으로 한 주가 멀다 하고 주말 골프를 쳤다. 한 임원은 법인 차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주유비도 법인카드로 계산했다. 사업부 채용의 전권을 가진 부서장은 본인의 영향력을 악용해 고객사나 지인 자녀 채용에 입김을 넣기도 했다.
고위 직급일수록 '뉴욕타임스 룰'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이 '뉴욕타임스 룰'을 잘 지킬 경우 얻는 것도 더 많을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직장인으로서 우리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얼마 전 만난 대기업의 HR 매니저 역시 팬데믹 시대에 직원들 눈높이 맞추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기업 윤리도 큰 틀에서 보면 HR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뉴 노멀 시대에 맞는 기업 윤리 버전은 아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보자. 뉴 노멀 시대에도 노멀해야 하는 것이 있다. 기업 윤리도 그것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뉴욕타임스 룰'과 같은 팁은 뉴 노멀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단 너무 디테일한 접근은 무리다. 중요한 순간에 판단의 잣대로 활용하는 것이 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