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니 Z세대, Y세대, X세대, 386세대, 산업화 세대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세대가 변화하면서 서로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추억이 다른 것이 재미있으면서도 예전의 기억들이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꽉 찬 15년이 되어가는 직장 생활의 기억 중에도 가물가물해가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는 말들이 있다. 어떤 말들은 내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벅찬 감동을 주기도 했고, 그 어떤 것보다 큰 힘을 주기도 했다.
1. 2005년 첫 회사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부서 배치 면담을 했다. 경영지원 직군 합격자였던 나는 홍보팀에 지원했다. 배치 면담에서 HR팀장님이 나에게 말했다.
"전자공학 출신인 마크를 홍보팀에 배치하겠다고 올리면 위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양보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첫 회사의 홍보팀 언론담당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첫 단추부터 자기 뜻을 고집했던 것이 그 후로도 자기 주관이 분명한 캐릭터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됐다.
2. 홍보팀으로 부서 발령이 날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계열사 대표 부사장님이 보자고 하셨다. '무슨 일이지?' 부사장님이 신입 사원 연수를 막 끝낸 직원을 부른다니 뭔가 싶었다. 부사장님은 내 여러 가지 조건을 좋게 보셨다. 그리고는 꽤 놀라운 제안을 했다.
"마크, 전공이 전자공학인 걸로 알고 있어요. 저희 여수 공장 매니저가 필요한데 2, 3년 정도 여수에 내려가 있으면 제가 다시 서울 본사로 부를게요."
즉답을 하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만나서 제안을 수락할 수 없는 3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신입사원 부서 발령 때 다른 동기가 그 자리로 배치됐다. 그리고 그 부사장님은 몇 년 뒤 다른 계열사로 옮기셨다.
3. 사회생활 첫 부서는 홍보팀. 처음 몇 주는 발령받은 지 한참을 지나도 내게 주어지는 일이 없었다. 자리도 부서에서 외진 애매한 곳이었다. 회사 소개 자료, 브로셔, 80주년 사사를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한참 자료를 보다 춘곤증이 몰려왔는지 깜빡 졸았다. 하필 그 모습을 지나가던 팀장님이 목격했다! 물론 졸고 있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다음 날, 팀 미팅이 있었다. 한창 서로의 업무를 공유하는데 갑자기 팀장님이 팀원들 모두가 있는 그 자리에서 이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마크는 아직 일이 없나? 어제 보니 졸고 있던데?"
사수였던 부장님, 그리고 바로 위 선배였던 대리님의 표정이 어땠을까. 그 후로 '업무 시간에 졸았던 직원'이라는 꼬리표를 떼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4. 첫 회사는 전형적인 한국 회사였다. 당연히 술 문화가 존재했고 때로는 강압적이기도 했다. 우리 팀에서는 팀장님이 가장 술, 특히 맥주를 좋아했다. 1차에서 팀원들이 실컷 배불리 먹고 나면, 2차로 늘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하셨고 팀원들은 속으로 질색 팔색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랑 단 둘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날도 과음을 하셨는지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본인도 걸렸는지 내게 이런 얘기를 던졌다.
"마크, 나도 사실은 매주 교회 나가거든. 나는 신앙생활 잘 못하지만 마크는 나처럼 되지 말고 열심히 신앙생활해."
팀장님은 그 후로도 열심히 음주가무를 즐기셨지만, 당시 강압적인 음주문화에 내가 휩쓸리지 않게 항상 배려를 해주셨다.
5. 입사 당시 동기는 서른 명 정도. 일주일 간의 제주도 여행, 무인도 여행, 한 달 동안 회사 연수원에서 합숙하면서 지방 공장 투어를 다니며 동고동락했던 터라 동기애가 끈끈했다. 하지만 3년 정도 지났을까? 동기들 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기, 질투, 경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인기 있는 부서에서 일하는지, 회사에서 인정을 더 받는지, 소위 말해 잘 나가는 동기가 생겨났고 그러면서 끼리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해외 MBA에 직원을 보내주는 스폰서 프로그램이 있었다. 입사 당시부터 준비했던 나는 회사 내부 경쟁을 뚫고 지원자로 뽑혀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한 여자 동기가 사내 메신저로 이런 말을 했다.
"마크, 이왕 준비하는 거 꼭 합격해"
무슨 얘긴가 했는데, 나를 시기해서 험담하고 다니는 동기들이 있다고 했다. 동기들은 내가 자기만 챙긴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다녔다. 여자 동기는 이왕 도전하는 거 실패해서 험담하는 동기들을 의기양양하게 만들지 말고, 합격해서 아무 소리 못하게 다니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 오기를 냈고, 합격했고, 동기들 모두에게 고맙다는 메일을 날렸다.
6. MBA 최종 면접까지 보고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 회사가 난리가 났다. 회사가 판매하는 식제품에 이물질로 보이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어 홍보팀이었던 나는 사수인 부장님과 사태를 파악하고 언론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MBA 합격 통지 메일이었다. '세상에 하필 이 타이밍에...' 회사가 난리가 났는데, 누구에게도 합격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사태는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어 갔다. 방송사에서 취재가 오고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합격했으니 이제 몇 달 뒤에 유학을 가야 하는데, 과연 이 사태가 수습이 될지, 회사에서 나를 보내줄지, 보내는 거 취소하진 않을지, 온갖 걱정이 다 들었다.
밤 9시가 되었을까? 그날 첫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나, 팀장님, 그리고 부서장이었던 상무님 셋이서 회사 앞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대뜸 상무님이 물었다.
"마크 과장, 그거 MBA 지원한 거 결과는 나왔나?"
아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하나 싶었다. 그래도 대답을 해야 했다.
"예, 사실은 오늘 최종 합격 메일을 받았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 분위기에서 축하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크, 축하해. 여기 일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편하게 다녀와."
내가 지금까지 상사로부터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 물론 한 달 넘게 사태 수습하느라 고생했지만, 몇 달 뒤면 유학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틸 수 있었다.
7. 두 번째 회사를 다닐 때 디지털 관련한 신사업을 시작했다. 고맙게도 나도 그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다행히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나는 디지털 관련한 트렌드에 남들보다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다. 하루는 본사에서 만든 디지털 신사업 자료를 번역한 자료를 사장님께 보고 드렸다. 사장님은 그날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계속 표정이 좋지 않으셨는데 대뜸 이렇게 말했다.
"디지털 생태계? 누가 Digital Ecosystem을 디지털 생태계라고 번역해? 번역기 그냥 돌리고 체크 안 한 거 아냐?"
사장님에게 생태계는 그냥 동물, 식물의 생태계만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포털 사이트를 열어 '디지털 생태계'를 쳐서 직접 보여드릴까 하다가 그냥 참고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아, 여기서는 디지털의 미래가 없구나' 생각하고 이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8. 최근 이직했을 때, 나는 공식적으로 이력서를 내거나 면접을 보지 않았다. 커뮤니티 모임에서 같은 세션에 참여했던 대표님이 평소 눈여겨 보신 것만으로도 나를 채용해주셨다. 그때는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이직하고 한 달 정도 지나서였을까? 대표님께 물었다.
"대표님, 그런데 왜 저를 바로 뽑으셨나요?"
대표님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내셨다.
"마크님이 커뮤니티에서 모임을 운영할 때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를 파악하고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지며 운영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외국계 기업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했던 것도 물론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대표님이 가장 우선시했던 건 바로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존중했던 자세였다.
말에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15년을 돌이켜봤을 때 상처가 되는 말보다 힘이 되는 말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서 기억나는 힘이 되는 말을 해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