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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Oct 06. 2023

내 시계가 내는 알람소리

 탁상시계가 하나 생겼다. 딸애가 독립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쓰던 것을 내게 무슨 큰 선물을 주듯 안기고 간 것이다. 내심 반가웠다. 내 방에 따로 마련된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고 싶을 때마다 핸드폰의 화면을 두드려대곤 하던 불편이 사라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뿐만이 아니다. 비염으로 인한 코 막힘 증상 때문에 주구장창 가습을 해대는 통에 온 방이 곰팡이의 온상이 될 지경이라며 핀잔을 주곤 하던 아내와 더 이상 씨름할 일도 없어졌다. 시계에 내장되어있는 습도계는 그야말로 가습의 필요여부를 판가름해줄 바로미터가 되어줄 게 틀림없었다. 

 건전지를 새로 사다 넣자 시계는 디지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순식간에 화면 곳곳에 여러 가지 수치를 띄워주었다. 그러나 싸구려임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리얼타임클록이 제공되지 않아 모든 수치들을 직접 설정해야했다. 설명서야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평소 이런저런 스마트기기들을 사용해왔던 나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시계 뒷면에 있는 설정버튼과 마주했다. 버튼은 톱니바퀴 모양 하나에, 위와 아래로 향한 화살표 모양이 각각 하나씩 총 세 개였다. 

 단박에 모든 버튼의 기능을 섭렵할 수는 없었지만 지레짐작으로 세 가지를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눌러가며 화면의 변화를 관찰한 결과 대충 감이 잡혔다. 연도와 날짜에 이어 시간 설정이 순조롭게 마쳐졌다. 마지막 남은 것은 알람기능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시계 윗면 한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버튼과 연관이 있어보였다. 물리적인 버튼이 아니라 그저 평면상에 Snooze라고만 씌어있을 뿐이지만 그곳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 화면에 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계는 좀처럼 자신의 은밀한 기능을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근 한 시간 가까이 붙들고 늘어졌지만 난 원하는 대로 알람을 설정할 수 없었다. 결국 공대출신이라는 간판마저 집어던지며 포기를 하는 수모를 곱다시 감당해야했다. 뭐 알람이야 그다지 중요한 기능이 아니니……. 혼잣말이 나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이런저런 일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후 막 잠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알람소리가 크게 울렸다. 다름 아닌 새로 생긴 탁상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얼른 시계를 집어 알람을 죽이려 했지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버튼이고 마구 눌러댔다. 소용이 없었다. 그 사이 소리의 주기는 점점 짧아져 마침내 숨이 넘어가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Snooze라 적혀있던 부분이 떠올라 엉겁결에 거기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행히 발악이 멈추었다. 한숨을 쉬며 시계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새벽 네 시였다. 

 다시 머리를 눕혀 정신이 가물가물할 때였다. 알람이 또 울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Snooze라는 단어가 알람을 완전히 끄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재워두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 기억났다. 다시 시계를 부여잡고 알람을 끄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했다. 불행하게도 알람은 그치질 않은 채 피를 토하듯 절규하기에 이르렀다. 방법이 없던 나는 건전지를 분리하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람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그때는 내 잠도 죽어버린 뒤였다. 아마도 초기설정을 하는 과정 중에 무언가를 잘못 동작시키는 바람에 새벽 네 시에 알람설정이 되었을 거라는 추정만이 머릿속을 황량하게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검색하며 알람설정방법을 캐내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드넓다는 사이버공간이었지만 제작사의 이름마저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중국산 시계의 설명서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재설정을 하는 과정에서 알람이 설정되면 시계그림의 표시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안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자랑스레 간직하던 자칭 디지털노마드의 호칭은 온데간데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알람이 Off된 상태로 모든 설정을 마무리 지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한밤중에 또 다시 알람이 울어 젖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난 여지없이 탁상시계의 재범을 의심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탁상시계는 지난날의 죄과를 반성하며 묵언수행 중이었고 대신 스마트워치가 포효하고 있었다. 스마트워치야 종종 내가 알람기능을 사용하곤 했으니 잠재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원치 않는 알람이 작동한 원인 또한 쉬 밝혀냈다. 아침 달리기를 한 후 샤워를 할 때마다, 착용했던 워치의 표면에 묻은 땀을 씻어내기 위해 물 세척을 한 것이 문제였다. 세척과정에서 버튼들이 잘못 눌러져 저절로 알람이 설정되어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난 또 하루치 잠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말았다.  

 그 이후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탁상시계를 쳐다볼 때면 알람표시가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고 스마트워치를 세척한 후에는 알람기능이 켜진 건 아닌지 살펴보게 되었다. 그건 무심코 내가 저지르는 일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던져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생을 저지를까 봐 발걸음조차 조심스레 옮긴다는 불가의 스님들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알람은 말 그대로 나에게 경종(警鐘)을 울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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