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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Nov 14. 2023

그물을 헤치고 - 아이리스 머독

 이 책을 접하는 순간 문득 숫타니파타라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났다.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와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니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경전의 말은 분명 ‘무소의 뿔’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혀져있겠지만 내가 눈길을 주시한 곳은 책의 제목과 겹치는 ‘그물’이라는 단어였다. 어쩌면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순간적으로 작동한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자 나의 그 예감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물론 정확히 일치하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의 그물이 사사로운 생각이나 잡념 따위를 뜻한다면 소설의 그물은 편견이나 고정관념 또는 안이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면서 올바른 삶을 위해서라면 늘 벗어나고자 애쓰는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 사이에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소설을 끌고 가는 전체적인 소재는 두 쌍의 남녀 즉 제이크인 나와 애너, 휴고와 새디 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흔히들 이야기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가 끼어든다. 내용 가운데 소개되는, 제이크가 휴고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쓴 ‘말문을 막는 것’이라는 책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것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난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지만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나마 책을 다 읽은 후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을 무렵에야 대충 감을 잡았을 뿐이다. 그다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그건 아마도 어떤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를 통해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제대로 알 수 없으며 행위를 통해야만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라도 추론이 가능했던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설이 던져주는 주제의 일부가 거기에 해당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번역 일을 하면서 안이하게 살아가는 작가지망생 제이크는 동거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 집에서 내쫓기다시피 한다. 그는 당장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한때 사랑했던 애너를 찾아간다. 애너는 자신의 동생인 새디가 외국으로 떠나면서 집의 관리인을 찾는다는 정보를 주고 그녀를 만나보라고 권한다. 제이크는 새디를 만나면서 자신의 대화록 책인 ‘말문을 막는 것’속에 등장하는 대화당사자 휴고를 찾게 된다. 순간 그의 동의 없이 책을 발간함으로써 그동안 시달려왔던 죄책감이 다시 떠올라 괴로워한다. 거기다 새디는 휴고가 자신을 스토킹한다며 그로부터 보호를 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이크는 자신이 애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와의 관계회복을 꿈꾼다. 그러나 휴고가 애너를 사랑하고 있으며, 새디가 휴고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언니를 사랑하는 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스토킹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제이크는 휴고를 만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굳이 ‘말문을 막는 것’이라는 책의 내용 일부를 인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이크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진실로 다가가는 길의 장애물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제이크의 오해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사랑의 사슬과 관련되어있다. 그의 판단과 달리 애너는 휴고를 사랑하고 있었고 휴고는 애너가 아닌 새디를 사랑했으며 새디는 휴고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휴고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휴고의 동의 없이 책을 출간한 관계로 많은 마음고생을 하며 비난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휴고야말로 그 책의 진정한 독자로써 책을 통해 많은 배움을 얻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말로써 그를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휴고의 논리가 신빙성을 가지며 그것이 곧 소설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제목에 언급되는 그물은 주인공 제이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의미를 지닌다. 제이크는 환경에 맞서 싸우려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명확한 미래를 설정하고 그걸 쟁취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번역이나 하면서 적당히 살다보면 그저 작가가 되려니 하고, 자신이 각별히 애너를 사랑하면 애너 또한 그러하려니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작가는 그물 속의 삶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그런 그물에 갇혀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제이크는 보통사람의 전형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삶을 살아가던 제이크가 휴고를 통해 자신이 그물 속에 갇혀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거기서 벗어나려 시도한다는 점이다. 그는 마침내 직업을 구해야겠다고 발 벗고 나선다. 자신의 원고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글을 쓸 다짐도 한다. ‘그물을 헤치고’는 바로 이런 모습을 상징한다. 이 책을 다 읽자마자 나 역시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그물을 헤치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타성에 젖은 생활부터, 게으르고 나태한 습관으로부터, 나이 탓을 하며 매사 포기만 일삼던 습성으로부터 벗어날 때라야 내 삶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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