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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Nov 19. 2023

햄릿형 인간의 결코 쉽지 않은 선택

 모처럼 독립한 딸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직업의 특성상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 할 수밖에 없는 녀석에게 무언가 당근의 역할을 할 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던 아내가 제시한 의견이었다. 아내와 내가 해외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못 부러운 눈길을 숨기지 않던 녀석의 모습이 눈에 밟힌 탓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녀석은 여행지의 선정부터 시작해 모든 과정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걸 지켜보면서 난 여행계획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있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와 여행을 갈 때면 비행편부터 숙소는 물론이고 방문할 곳의 동선까지 꼼꼼하게 살피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배경에는 자칫 잘못해 녀석으로부터 핀잔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부녀지간이라지만 둘 사이에는 엄연히 세대차이라는 커다란 벽이 가로놓여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 선호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려니 하면서도 가끔 걱정이 될 때면 ‘이번 여행은 우리 딸이 모두 알아서 해. 우린 그냥 따라만 다닐 거야.’라는 말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행을 떠나기까지 한 달쯤 남았을 무렵이었다. 가끔 녀석의 입에서 넋두리가 새어나왔다. ‘숙소를 알아봐야하는데……. 짬이 잘 안 나네.’ 난 그 말을 애써 무시했다. 관심을 보이는 순간 그건 내 일이 되고 혹시라도 현지에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는 날에는 곱다시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써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아내의 불만이야 그동안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쌓인 정에 기대 대충 눌러버리면 그뿐이지만 딸은 달랐다. 더구나 이번 여행은 오로지 그의 수고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던가. 

 눈치싸움을 벌이던 며칠 뒤였다. 핸드폰이 연속으로 여러 차례 부르르 떨어댔다. 열어보니 여행지의 호텔 몇 곳이 링크되어있었다. 녀석이 나름 숙박후보지로 정한 호텔인 모양이었다. 마지막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있었다. ‘엄마 아빠가 상의해서 이것들 중에서 하나로 골라. 내가 바쁘다보니 세세하게 살필 겨를이 없네.’ 녀석은 저한테 배당된 결정권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었다. 내가 느끼던 부담감이 녀석의 문자 행간마다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아내야 애당초 자신은 열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권한의 이양에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나 역시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녀석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숙소는 어떻게 되었어?’ 이번에는 숫제 숙소가 우리 책임으로 바뀌어있었다. 난 녀석과 동일한 수법을 동원했다. ‘딸이 알아서 정하셔. 딸이 좋으면 우린 뭐든 좋아.’ 나의 교활한 응대에 결국 공은 다시 굴러 녀석에게로 넘어갔다. 

 녀석의 당혹해하는 표정이 머릿속에서 선연히 그려지면서 조금은 짠해졌다. 아무래도 녀석을 좀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세 군데 호텔을 몇 가지 관점에서 비교하는 표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나의 본심을 그 속에 숨기듯 심어두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호텔을 녀석이 선택할 수 있도록 장단점이라는 칸을 만들어 약간의 술수를 부린 것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것인지 아니면 고민을 하는 것인지 그로부터 이틀 동안 녀석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때는 표적이 바뀌어있었다. ‘엄마는 어디가 제일 좋아?’ 하지만 아내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가격은 A, 위치는 B, 감성은 C.’ 내가 만든 표를 보면 누구나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답을 아내는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었다. 사실 ‘감성은 C’라는 답이야말로 내가 유도한 것이었다. 내 딸이라면 그걸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걸 모를 까닭이 없는 나였던 것이다. ‘그렇지? 역시 엄마는 나와 통해. 그럼 C로 아빠가 예약 좀 해줘.’ 녀석은 그렇게 제 의무를 다한 것처럼 대화방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다. 

 문제는 우리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그 호텔의 방이 매진되어버린 점이었다. 급하게 우리의 대화방은 복구가 되었고 차선(次善), 차차선(次次善)을 외치면서 A와 B를 차례로 예약하려했지만 워낙 인기 있는 관광지라 그조차 모두 사라진 뒤였다. 우린 어느새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행여 여행이 무산되기라도 할까봐 녀석의 문자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매달려있었다. 애처로웠다. ‘아빠가 다시 알아볼게. 그러니 이번에는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골라야 해.’

 앞서와 비슷한 형태의 표를 들이밀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나보고 고르라고 한다면…….’ 아까보다 더 내 의도를 확실하게 드러냄으로써 선택에 빨리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상등이 깜빡거렸다. 그걸 알리는 순간 이번에도 숙소의 잘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의 몫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귀는 삽시간에 180도 방향을 바꾸었다. ‘어떤 것이 될지 맞춰봐. 마누라와 딸이 나랑 얼마나 교감이 이뤄지는지 이번 기회에 한 번 보자.’ 거기에는 실로 음흉한 뜻이 내포되어있었다. 대답을 잘 살펴보면 역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가장 먼저 미끼를 덥석 물었다. ‘혹시 D 아냐? 거기가 제일 나아 보이는데.’ 아내의 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선심 쓰듯 이렇게 알렸다. ‘그럼 D로 결정할까? 내가 원한 곳은 거기가 아니지만.’ 뒤에 이어진 약간의 거짓말로 교묘하게 은폐된 나의 뜻은 그렇게 관철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호텔은 확정되었다.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벌이는 햄릿의 고민이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선택이라도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감안한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 가족과 같은 극소심형인 혈액형A 집단들에게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럼에도 우린 매번 무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럴 때마다 이런 믿음을 갖기로 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 해도 이걸 선택했을 거야.’ 그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 선택에 대한 자신감은 훨씬 커지지 않을까? 아울러 자신감이 커질수록 난 더욱 다음 선택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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