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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Dec 09. 2023

유행 지난 바바리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추위가 먼저 찾아온 셈이다. 꽤나 겨울을 좋아했던 나지만 서둘러 찾아온 한파가 마냥 반갑지가 않다.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찬바람에 대지의 모든 생명들이 움츠러드는 걸 보다보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쭈글쭈글해져 가는 피부와 줄어드는 머리숱의 내 모습이 연상되곤 한다.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동네주변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데 걱정스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하는 것도 마뜩잖고 행여 얼음판에 미끄러져 낙상이라도 당할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일도 불만이다. 그러지 않으려니 또 챙겨야 할 물건들이 많다. 두툼한 외투는 물론이고 장갑에도 털모자까지 중무장을 해야 한다. 성가시지만 집안에서만의 답답함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옷장의 문을 여는 순간 새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좀체 옷 사는 일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는 내가 몇 년 전에 거금을 들여 산 것이었다. 특별한 외출이 아님에도 선뜻 그 옷에 끌린 이유는 최근 아내가 나에게 해 준 특별한 조언 때문이다. 이제는 옷차림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궁상맞아 보이지 않고 아끼는 물건일수록 더욱 자주 사용해야 해. 그 말을 하면서 아내는 나이가 들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철칙이라는 붙임말까지 덧붙였다. 외투를 꺼내 입었다. 불현듯 고이 모셔두었다가 어느 날 더 이상은 그 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알면서 허망함과 상실감을 오롯이 느끼던 언젠가의 기억이 불쑥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입사시험에 합격했을 때였다. 어머니와 함께 한 백화점에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이제 곧 직장인이 될 터이니 겨울용 바바리 한 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권유를 좇아서 나선 걸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찌든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 집이었기에 분명 어머니는 그 말을 하기까지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난 굳이 모른 체 외면하며 당시 친구 사이에서 유행하던 바바리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만 젖어있었다. 앞으로 받게 될 월급의 일부를 생활비에 보태면 그 보답은 충분히 될 거라 자위하면서. 

 마음에 드는 바바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어 시험착용으로 내 몸에 맞는 사이즈를 확인하면서 구매물품은 확정되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가격표의 금액이 예상을 훨씬 벗어난 탓이었다. 어머니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옆에 있던 좀 낮은 가격대의 옷들을 손수 들어 보이면서 바꿀 의향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런 옷들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난 못마땅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짜증까지 내면서 그냥 돌아가자는 말까지 불사했다. 입사를 축하해주러 왔다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어머니는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고 종업원에게 내가 원하는 것으로 포장해달라고 말했다. 

 무려 37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 바바리의 가격표에 적힌 금액까지도. 그건 내 첫 월급의 삼분의 일이 넘는 액수였다. 모르긴 해도 당시 우리 식구들의 한 달 생계비 정도는 거뜬히 되고도 남았을 그 돈을 난 어머니로 하여금 내 옷값으로 지불하도록 협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생각이 날 때마다 난 애써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하며 자기합리화에 급급했지만 사실 당시 내 나이는 철부지로 취급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분수에 맞지 않을 정도로 비싼 옷을 산 탓에 난 그 옷을 애지중지했다. 특별히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면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드라이클리닝이 아니면 세탁조차 불가능해 세탁비용 또한 만만찮다는 걸 인식한 결과이기도 했다. 옷은 제 계절이라 할 수 있는 겨울이 와도 옷장 속에서 보내는 날이 훨씬 많았다. 지금 와서야 고백하는 말이지만 그 옷을 입은 횟수라고 해봐야 아무리 넉넉하게 계산해도 겨우 열 손가락을 채울 정도에 불과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긴 만큼 옷은 결혼 후에도 나를 따라와 신혼방 장롱 속 노른자위 자리를 어김없이 차지했다. 

 세월은 모든 분야에서 변화를 재촉하는 법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패션계는 유행이라는 촉매의 영향으로 변화의 속도를 더욱 가속시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내 바바리는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연히 겨울이 와도 그 옷이 나의 선택을 받는 일은 점점 드물어갔다. 그러다 결국 어느 날 폐의류함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걸 버리던 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미 돌아가신 후라 안타까움은 훨씬 더하다. 옷을 사줄 때의 어머니 심정을 생각하면 왜 그런 불효를 저질렀을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한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한다면 그 뒤로 무엇이든 물건을 구입할 때면 그 효용성에 대해 거듭 따져보는 습관이 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옷의 구입에는 아주 철저하게 보수적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 꺼내 입은 외투 역시 비슷한 사례다. 아내를 구슬려 서울까지 가서 그 옷을 구입했지만 역시나 지금까지 입은 횟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옷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끼는 물건일수록 사용빈도를 높여야한다고 아내가 강조한 것도 나의 이런 상황을 냉철하게 꿰뚫어 본 탓이 분명하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어쨌든 지금이라도 각성한 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다. 

 옷장을 한 번 살펴보았다. 철이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느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무슨 옷들이 이렇게 많은지 여유 공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이제야말로 이것들을 어떻게 입을지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옷뿐만이 아니라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할 것이 아니라 가진 것들을 슬기롭게 소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것이라는 개념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하게 사용한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걸 실천하는 것만이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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