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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Dec 20. 2023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노안이 찾아왔다. 나이 육십을 넘긴 것이 벌써 몇 해 전이니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핸드폰을 이용하고 책을 읽는 일이 많이 불편해졌다. 불편함은 생활습관의 변화를 강요했다. 어릴 적부터 심한 근시를 앓아왔기에 안경을 쓰는 것에만 익숙해있던 내 눈은 이제 그럴 때마다 안경을 벗게 만들었다. 단순히 안경을 벗어 해결될 일이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그게 아니니 문제였다. 

 노안은 근시를 원시로 바꾼 것이 아니라 근시와 원시, 두 가지를 공생관계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 안경을 착용하지 않으면 근시가 작동했고 안경을 쓰면 원시가 작동했다. 가까운 것을 보기 위해 안경을 벗으면 보란 듯이 근시란 놈이 나타나 사물과 눈 사이의 거리를 사정없이 좁히도록 요구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도수 안경이라는 또 다른 안경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안경점에 가서 저도수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안경도 두 가지를 써야하는 나이가 된 셈이다. 

 노트북 작업을 하기 위해 저도수안경을 꺼내 썼다. 느껴질 정도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글씨들이 훨씬 또렷해졌고 그러면서 모든 작업의 효율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별천지가 열린 것 같았지만 이내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편리함을 좇아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다면 머잖아 더한 노안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인체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이니까. 처음 근시안경을 쓸 때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으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추론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 심한 눈병을 앓았다. 당시 한창 유행했던 아폴로눈병이었다. 의료시설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열악했던 시절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적당히 약국에서 사온 안약에만 의존해 치료했다. 주먹구구식 치료는 완치 후 시력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작은 글씨체를 구사하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이면 칠판글씨를 노트에 옮기는 게 힘들었다. 그때마다 옆 짝꿍의 노트가 중계역할을 했다. 결국 난 가난한 살림에 안경이라는 문명의 짐을 더 얹을 수밖에 없었다. 

 안경이 습관화된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안경알을 깨뜨렸다. 덕분에 그날은 안경을 벗은 상태로 수업을 받아야했다. 그때 난 망치로 머리통을 얻어맞는 것 같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칠판글씨가 숫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반 이상은 나안 상태로 옮겨 쓰고 했건만. 뿐만이 아니었다. 이후 안경점에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할 때마다 나의 시력은 점점 나빠졌고 안경알의 두께는 두꺼워져만 갔다. 아울러 더 이상은 안경을 벗은 상태에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철저하게 신봉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저도수안경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경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내 시력은 거기에 의존도를 더욱 높일 것이고 더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내 소지품 목록에서 저도수안경은 사라졌다. 대신 휴대폰 화면을 볼 때면 몇 번이고 끼고 있는 근시안경을 코끝에 걸치다시피 고쳐 써야 했고 책을 읽을 때면 허락하는 한 최대로 팔을 뻗어 초점거리를 맞추어야했다. 종종 나안으로 사물을 대하기 위해 안경 너머로 눈을 흘기다시피 치뜨는 습관마저 생겨났다. 불편함은 더욱 커져갔지만 고스란히 그걸 감내하면서 난 은근히 위안을 얻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쓸 만한 시력을 갖추었노라고.

 그런 나의 행동이 어리석음의 소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면을 여러 개로 분할해 노트북 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화면분할은 작업공간의 면적을 줄였고 자연히 내 시력으로는 대처가 불가능했다. 안경을 벗고 얼굴을 모니터에 최대한 가까이 바싹 붙이거나 아니면 저도수안경을 쓰는 도리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바로 그 순간 난 여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안은 나이를 먹으면서 당연히 찾아오는 현상이다. 떼를 쓴다고 찾아오지 않거나 늦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달갑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은 집착에 불과하다. 그건 나아지려는 의지가 아니라 욕심일 뿐이다. 그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난 그동안 저도수안경으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편리함마저 내팽개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탐탁지 않더라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건만. 그것이 인생이건만. 스스로에게 너무 추악한 모습을 내보인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노안이 오지 않았다면서 아집을 부려보았자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버틴다고 해서 시력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엔 어떻게 하면 노안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편이 백배 낫다. 저도수안경이나 돋보기안경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시력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서둘러 안과상담을 받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기에 세월을 거스르려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월을 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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