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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Jan 19. 2024

버리고 나면 꼭 필요해지는 아이러니

 몇 달째 이어지는 허리 병의 원인이 혹시 백팩 때문은 아닐까? 사실 그 의심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걸 어깨에 메고 다녔을 뿐 아니라 그때마다 허리에 부담을 느끼곤 했으니. 백팩의 무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안에는 노트북과 관련 케이블은 물론 책이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들어있었다. 

 이번 기회에 손가방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에 어깨끈이 달려있어 손목이나 팔 힘이 부치면 곧바로 어깨에 멜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창고를 뒤지자 그건 어렵지 않게 찾아졌다. 하지만 상태는 생각과 많이 달랐다. 이것저것 쑤셔 넣다보니 의외로 수납공간이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손잡이가 영 부실해 금방이라도 노트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내에게 SOS를 날렸다. 부탁을 듣자마자 아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치곤란이다시피 하던 노트북 가방을 소환했다. 그동안 우리가 산 노트북의 수량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이들 몫이며 내 몫이 따로 있었을 뿐 아니라 몇 년 만 지나면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는 IT 기기의 특성상 수시로 교체가 이루어진 탓이었다. 그때마다 수명이 다한 노트북은 폐기물 수거장으로 사라졌지만 가방은 마치 역사적 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꼬박꼬박 창고에 보관되었다. 아내가 내 기억을 상기시킨 건 바로 그 가방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창고에는 그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창고정리라는 미명하에 불과 며칠 전 그것들을 모두 처분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하나쯤 남겨둘 법도 하건만 아무리 뒤져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정리였다는 아내의 부연설명은 나를 더욱 후회로 내몰았다. 안타까움에 계속 창고를 뒤지는 나를 보며 아내가 말했다. 종종 재활용품 수거장에 가면 그런 가방들이 나오곤 해. 그러면 내가 깨끗한 놈으로 내가 하나 구해다 놓을게. 우린 늘 그런 식이었다. 다시는 쓸 일이 없다며 과감하게 버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필요성이 절실해져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그 때문에 몇 년 동안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조차 차곡차곡 쟁여놓기도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이 부부싸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해 사그리 정리하고 나면 또 이렇게 아쉬운 순간과 마주하곤 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창고를 뒤진 보람은 있었다. 용도에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용 손가방을 하나 찾아냈다. 아쉬운 건 용도 자체가 다른 만큼 노트북에는 어울리지 않게 크고 투박하다는 점이었다. 부피만으로 보자면 노트북이 아니라 데스크 탑도 거뜬히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궁여지책으로 그걸 가져다 노트북을 넣은 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도서관이며 동네 카페를 출입하기에는 궁색해보였다. 불현듯 어린 시절 추운 겨울날이면 몸에 맞지 않게 큰 아버지의 외투를 입혀주곤 하던 어머니가 연상되었다.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어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추워서 덜덜 떠는 것보다 백배 낫지 않느냐며 내 가벼운 입을 여지없이 다물게 만들었다. 여행용 가방 역시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허리 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보다는 분명 나은 선택이었다. 난 아쉬운 대로 그것을 백팩 대체용품으로 결정했다. 

 가방 한쪽 면에 여행용캐리어의 손잡이에 걸 수 있도록 특수한 걸이가 마련되어있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건 해외여행 때도 백팩이 아니라 이 가방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행 중에도 항상 내 곁을 지키는 노트북임을 감안하면 허리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휴대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표현이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방의 공간이 넉넉해 캐리어중량이 수하물허용중량을 초과할 경우 짐을 분산하기에도 편리했다. 가방무게 때문에 쇼핑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한다며 불평하던 아내에게는 여행의 신기원을 여는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사실을 알리자 아내는 반가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난 노트북 가방을 정리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잔잔한 위로의 물결이 굽이치며 밀려들었다. 

 가방정리가 끝나자 방 한쪽에 여태 사용했던 백팩이 입을 벌린 채 무기력하게 널브려져있었다. 난 그걸 집어 들고 창고로 가 한쪽구석에 치워두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내가 말을 건넸다. 그럼 노트북 가방을 찾느라 재활용품 수거장을 뒤질 필요는 없겠네? 대체한 가방으로 완벽한 만족을 얻은 것은 아니었기에 난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굳이 애써서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어쩌다 괜찮은 게 눈에 띄면 주어다 줘, 아내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저 백팩은 버려도 되는 거야? 난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저건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돌아보니 아내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순간 우리가 죽으면 입게 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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