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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02. 2020

[X의 비극]/[Y의 비극](1932) - 엘러리 퀸

'연극'은 '만찬'이나, '현실'은 '비극'이다.

'연극'은 '만찬'이나, '현실'은 '비극'이다.
-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 [X의 비극]과 [Y의 비극]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합본, 엘러리 퀸(바너비 로스),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7.)



"'무대를 은퇴하고서야 비로소 인생 그 자체가 얼마나 극적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선 제약이 있고 속박이 있습니다. 머큐시오([로미오와 줄리엣] 속 인물)의 꿈 해석에 따르면, 극 중 인물이란 '공상에 불과한 것에서 생겨난 쓸데없는 관념의 산물'인 것입니다.'
두 방문객은 레인의 운치 있는 목소리에 어떤 신비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감정이 격동하면 무대 이상의 비극이 생깁니다. 그들은 결코 '공기보다도 희박하고, 바람보다도 불안정한 존재' 따위가 아닙니다.'
지방 검사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그 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격정에서 야기된 흉악 범죄 얘기입니다만, 범죄란 인간 비극의 극치죠. 살인은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것이고요. 평생 동안 저는 여러 저명한 남녀 배우들과 함께 일해왔습니다만...'
레인은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 여러 명우들과 더불어 저는 무대 위에서 최고의 인위적인 감동을 연출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감동을 현실에서 연출했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독자적인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선 수도 없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을 계획할 때의 고민이며 양심의 가책 따위를 연출했습니다. 악역으로는 맥베스 역도 했고 햄릿 역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난생처음 보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에도 놀라는 어린애처럼 이 세상이 맥베스나 햄릿으로 가득차 있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진부한 얘기입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 동안은 작가의 뜻대로 움직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 뜻대로 움직이며 보다 더 극적인 것을 창출하고 싶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레인은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귀를 건드렸다.
'오히려 주의 집중이 잘 되게 해주지요. 눈만 감으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소리 없는 세계로 빠져들 수 있으니까요.'"
- [X의 비극](1932), <제1막:제1장>, 바너비 로스(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7.


내가 한참 추리소설에 빠졌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 시절까지 코넌 도일(Conan Doyle)의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시리즈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장편들은 단연 나의 주관심사였다. 19세기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추리(미스터리)소설' 장르를 처음 열었으나 19세기 후반 영국의 셜록 홈즈와 프랑스의 아르센 뤼팡 등에 의해 유럽, 특히 20세기 들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활약으로 추리소설의 주도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는데, 1980년대 한국의 중학생이었던 내게도 역시 그랬다. '추리소설의 본토'로서 미국의 자존심은 예술평론가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S. S. 밴다인(Van Dine)이라는 필명으로 '파일로 밴스(Philo Vance)'라는 지적이고 현학적인 탐정을 앞세워 재부흥을 이끌었다지만 국내에서는 무명이었고, 그를 모방한 '엘러리 퀸(Ellery Queen)'이 20세기 초반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아성에 필적했다고는 하나, 내게는 역시 추리소설은 영국의 애거서 크리스티 경이었고 미국 추리소설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맨프레드 리(Manfred Lee:1905~1971)와 프레더릭 다네이(Frederic Danay:1905~1982). 두 사촌형제의 '필명'이자 그들 작품의 주인공 '탐정'의 이름인 '엘러리 퀸(Ellery Queen)'의 소설은 중학교 때 단 한 권,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비밀)](1932) 뿐이었고 나중에 커서는 해당 책은 물론 그 작가와 탐정 이름마저 잊혀졌다.
수년전 우연히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메소포타미아 살인] 등 오래된 흑백영화를 EBS '일요시네마'로 보았고, 다시금 옛 추억에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몇 권 사서 다시 읽고 소장하며 언뜻 떠오른 미국 작가가 바로 '엘러리 퀸'이었다.



(엘러리 퀸 '1기' - [국적+사물+미스터리] 시리즈 : 1929 ~ 1933.)


미국의 대공황기인 1929년 [로마 모자 미스터리]로 작가의 길을 선택하려던 두 사촌 '엘러리 퀸'은 대공황으로 인해 각각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하고 '필명'으로 활동하였지만 '다작'으로 유명해졌고, 1931년에는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의 흥행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하며 '다작'을 소화하기 위해 또 하나의 '필명'으로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하는데, 그 필명이 '바너비 로스(Barnaby Ross)'였으며, '엘러리 퀸'에 필적하는 새로운 탐정이 '드루리 레인(Drury Lane)'이었다. '엘러리 퀸'은 자신들이 '바너비 로스'라는 사실을 9년 동안 속였다는데, 한 해에 한 권도 내기 힘들 작품 흥행을 1년에 4권씩 '엘러리 퀸'과 '바너비 로스'의 필명으로 이루었다고 한다. 1932년에는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 미스터리]와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바너비 로스'의 [X의 비극]과 [Y의 비극], 1933년에는 '엘러리 퀸'의 [미국 총 미스터리]와 [샴 쌍둥이 미스터리], '바너비 로스'의 [Z의 비극]과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을 발표했다.


은퇴한 60대 셰익스피어 극의 명배우 '드루리 레인(Drury Lane)'은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이다. 가난한 비극작가인 아버지와 희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소가 무대 뒤였고 불우하게 조실부모했으나 부모의 동료배우들에 의해 키워지며 훗날 셰익스피어 연극의 명배우로 성공했고 은퇴 후 허드슨 강가에 '햄릿 저택'이라는 비현실적인 대저택을 지어 세상을 관조한다. 유럽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기사로 접하고는 엘러리 퀸과 같은 '연역추리'를 통해 서신으로 사건을 해결한 후 '탐정'이자 뉴욕경찰청의 '고문'의 지위를 얻는데 [X의 비극]은 섬 경관과 브루노 지방 검사가 이 중세풍의 '햄릿 저택'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드루리 레인의 첫 등장과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1939년에 등장한 '히어로' 캐릭터 '배트맨(브루스 웨인)'의 모티브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중세적이고 또한 신비롭기도 하다.
파티 자리에서 셰익스피어 극중 대사를 되짚어 연기하며 건배사를 대신하고, 귀가 안들려 상대의 입술을 보고 말을 읽는 '독순술'을 구사하며 눈을 감으면 깊은 침묵 속에서 '연역추리'를 작동하며, 전직 배우로서 변장을 통해 탐문수사로 경찰을 앞지르는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은 다른 작품 주인공인 '청년 탐정' 엘러리 퀸처럼 몇 가지 주요단서로 큰 가설을 세우고 다른 단서들의 논리적 조합을 통해 가능성들을 소거해 가는 '연역추리법'을 구사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비극 시리즈'의 주인공답게 '노년'(20세기 초에는 지금과 달리 60대가 '노년'이었으리라)의 중후함으로 인간 심리 내면의 '비극성'을 체현한다. 이십대의 '청년' 엘러리 퀸으로 그려내지 못한 작가들이 '바너비 로스'라는 다른 필명으로 색다르게 그려내고 싶은 캐릭터의 다른 한 측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은 '청년 탐정' 엘러리 퀸과 '연역추리법'의 공통분모로부터 가지를 뻗어 상반된 캐릭터를 연출한다.

20세기 후반 일본의 미스터리소설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미스터리의 고전'으로서 '엘러리 퀸/바너비 로스'는 잘 짜여진 추리소설 구도와 지적인 탐정의 유산은 물론, 일본의 '소년 탐정 김전일'과 우리나라 '중년 탐정 김정일'의 패러디를 낳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요컨대, 당신이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좌천이라도 당하게 될 경우엔 즉시 나는 당신에게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고 당신이 명예와 지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만은 당신에 대한 나의 의무니까요, 경감님...'
'그렇다면 정말 고마운 얘기로군요.'
경감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지금, 비난의 소리도 가라앉았고 경감님도 전과 다름없이 훌륭하게 근무하고 계신 지금에 와서는 당신들 두분에게는 사실을 숨겨둘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 사건에 대해 내가 대처했던 방식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셔서 범인의 죄상을 언제까지나 비밀로 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브루노와 경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모두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경감은 몇 번이나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납득이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경감은 풀잎을 쥐어뜯어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범인은 희생자에게 마시게 할 작정이었던 독이 든 우유를 자신이 마시는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레인씨?'
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감은 몸을 내밀고 초조하게 레인의 무릎을 두드렸다.
'레인씨, 제 얘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갑자기 브루노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거칠게 경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경감이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괴로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브루노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경감. 레인씨는 지금 피로하신 모양이오. 우리도 이제는 슬슬 뉴욕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 [Y의 비극](1932), <무대 뒤에서>, 바너비 로스,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7.


전작인 [X의 비극]에서 드루리 레인은 셜록 홈즈 못지 않은 활극적 요소로 '비극'적 범인 'X'를 멋지게 밝혀낸다. 추리소설의 필수 요소인 사건의 복기를 연극배우답게 <무대 뒤에서> 설명하면서 자신의 '연역소거 추리논리'를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본인은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며 '연역논리' 가설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깊은 침묵 속에서 집요하게 '증명완료(Q.E.D)'해 가는 이 장면은 마치 '늙은 엘러리 퀸'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화학자 요크 해터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Y의 비극]은 시종일관 광기어린 '해터 가(家)'의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요크(Y)'의 '비극' 전모를 파헤치려 하지만 결국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제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 물론 드루리 레인은 특유의 '연극'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범인의 행각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답을 말하지 않은 채 사건의 '종결'과 함께 '햄릿 저택'으로 돌아가서 은둔해 버린다. 물론, 자신을 믿는 섬 경감과 브루노 검사가 '미제 사건'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지경이 되면 모든 것을 밝히리라 생각하며 관망하고 있는 중에 [X의 비극]의 첫 장면 '제1막'처럼 두 사람의 방문을 받고 <무대 뒤에서> 설명하는 것이 [Y의 비극] '종막'이다.

'Y'의 '비극'을 어떻게 끝장내고 말았는지 작가 '바너비 로스'도 주인공 '드루리 레인'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중후한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의 "괴로움이 가득 담긴 눈길"([Y의 비극], <무대 뒤에서>)만이 묵시적으로 진실을 가리킬 뿐이다.


작가 '엘러리 퀸'이 은퇴하는 마지막까지 활약한 '청년' 탐정 '엘러리 퀸'과 달리 작가 '바너비 로스'는 3년 동안, '노년' 탐정 드루리 레인은 단 4편의 소설로 그 '배트맨'과 같은 음울한 소임을 다한다. 1933년에 발표한 [Z의 비극]과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은 이미 10년 후 70대에 이른 드루리 레인이 등장한다고 하며 서술형식도 1932년 두 편의 전작들과 다르다고 하니 나는 잠시 틈을 두고 읽어보려 한다.


"연극은 만찬과 같은 것이고, 프롤로그는 그 식전의 기도이다."
- [Y의 비극], <프롤로그>, 바너비 로스, 1932.


무대 위의 '연극적 비극'을 묘사하던 삶에서 나와 'X'와 'Y'의 '현실적 비극'을 추적한 60대 드루리 레인의 깊은 통찰을 작가 '바너비 로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그 일단의 '비극'의 막을 내린다.


"그의 공적을 부정하려거든, 전체적인 관점에서 냉철하고 사려깊게 판단한 다음에 그렇게 하라."
- [Y의 비극], <무대 뒤에서>, 바너비 로스, 1932.


***

- [XYZ의 비극](1932~1933), 엘러리 퀸, 서계인 옮김, <검은숲>,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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