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기스의 교환]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찐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의 결과인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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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