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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Nov 20. 2021

[자본론]을 읽던 시간 : 1998년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아버지의 겨울'

[자본론]을 읽던 시간 : 1998년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아버지의 겨울'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페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 K. Marx, [자본론] 1권, <2편 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1867.




1.


아버지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날, 함께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도 모르게 "별 거 아니에요, 아버지. 같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을 믿고 힘을 내시라'는 의미였지만, 사실 정말 모르고 한 말이었다. 내 가족 중에, 그것도 아버지가 걸린 암이란 게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여든이 넘은 고령의 약한 몸에 중병에 들었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 본인은 어떠셨을까.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탈까 하다가 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올라탄 부자를 싣고 버스는 맑은 가을 오후를 내달렸다. 11월 초의 오후 햇살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치료 안 받으셔도 돼요. 근데 상태가 지금보다 상당히 안 좋아질 거예요."


그 다음주 1차 검사결과를 들으러 찾은 국립대학병원 폐암전문 교수는 "머리 빠지는 항암치료나 수술 같은 건 받지 않겠다"며 누가 묻기도 전에 결연하게 선언하는 아버지에게 간단하게 경고했다. 아마도 익숙한 상황에 대한 역시나 익숙한 답변 같았다. 암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보호자인 어머니를 비롯한 큰누나와 매형, 그리고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여든이 넘은 고령으로 '올 것이 왔다', '예견했다'는 의연한 반응을 겉으로 보이시며 항암치료를 거부하겠다던 아버지 또한 의사의 건조한 대답에 더 이을 말을 찾지 못한 듯 했다. 모르는 사람이 용감하다지만 이런 중증 의학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었나 보았다. 나는 내심 치료를 거부하시는 고집 센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싶은 걱정으로 어머니는 물론 큰누나와 큰매형까지 동반하여 진단결과를 들었던 건데, 우리 가족은 애줄없이 일심으로 병원의 소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폐암은 직접증상이 없어 보통 폐에 물이 차고 기침이 잦아 병원을 찾으면 말기에 해당되는 4기라고들 한다. 젊은 사람들은 세포활동이 왕성해서 그런지 다른 곳으로 전이도 많을 수 있는가 본데, 아버지는 노인이라 전이는 바로 확인되지 않으나 입원을 해서 어떤 약물치료가 적합한지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대학병원이라 입원 예약만 하고 병실이 날 때까지 집에서 대기를 했다. 아버지의 방에서 들려오는 기침소리가 더 잦아지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2.


1997년 12월에 제대를 하면서 대부분 그렇듯 나도 이제 부모님께 효도하고 열심히 공부도 해서 좋은 곳 취직도 하고 돈도 많이 벌자고 다짐했다. 복학 전 막내매형을 따라 건설현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읽은 루이 알튀세르의 [자본론을 읽자]라는 책에 꽂혀 무슨 심오한 계시라도 내린 듯 이제 진정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한 번 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효도'는 커녕 이미 군입대 전으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효도는 평생 배관노동자로 살아온 그 삶을 자본주의체제의 임금노동자에 빗댄 '과학적' 분석과 이해로 대체되었다. IMF 경제 위기로 일거리가 없어지고 아버지가 그나마 한 일에 대한 임금 조차도 제때에 못 받았을 때, 나는 아르바이트 일거리가 없는 날에는 밤을 새며 [자본론]을 읽었고, '아버지의 겨울'이라는 단편소설도 습작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60003763138&referrerCode=0&searchKeyword=%EC%95%84%EB%B2%84%EC%A7%80%EC%9D%98%20%EA%B2%A8%EC%9A%B8


일체의 자본이나 생산수단과 분리된 채 가진 거라곤 노동력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시대 '자유로운 노동력'으로서 아버지들의 모습을 나는 본질적으로 보고자 했고, 하수상하던 그 시절은 고향에 땅을 보러 같이 내려갔지만 사실 아버지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으며 대출받을 길도 전혀 없었던 1998년 겨울의 풍경이었다. 원래부터 예견되었지만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낡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던 그 겨울의 음산함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었던 아버지와의 기억에 남는 동행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결혼도 하고 부모님과 자녀 셋까지 3대 일곱 식구에 말래뮤트 대형견 한 마리까지 대가족을 꾸리게 되었다.

아버지와는 내 젊은 시절부터 의견 대립이 자주 있어 왔고 서로 고집이 세기에 어지간한 타협점은 없어 함께 살아도 대화는 별로 없었다.

'태극기 부대'로 추정되는 마을 복지관 친구분들과 광화문 집회에 가셔도 아버지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는 피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줄창 데모를 따라다녔으니 이제는 내가 번 돈으로 아버지 또한 당신의 정치적 의사에 따라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실은 아버지와 다투기가 싫어서 피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아들이 한 번도 구독료를 내주지 않는 동아일보 기사 한 조각을 오려서 들고 나오시거나 식탁에서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시면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며 내심 뜨끔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화목한 3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루에도 수차례 울려대는 아버지의 '태극기 할아버지' 카톡 퍼나르기는 흡사 어린 시절 집 앞이나 교실 앞에서 주운 '행운의 편지' 같았는데, 당장 주변에 무차별로 퍼뜨리지 않으면 수신자가 '자유대한민국의 공산화'라는 대재앙을 입게 되는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의 카톡문자를 받는 족족 읽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그것도 카톡 일대일 대화창은 내가 나가도 상대방이 알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 감행한 조치였지 그걸 모르던 때는 솔직히 하루에도 십수번 울리던 아버지의 카톡이 싫었다. 좋은 풍경사진과 진기한 동영상은 가끔 보고 정말 아주 가끔 '멋지네요~' 답글도 드렸지만, 역사적 교훈이 담긴 문구들을 읽다가 마지막에 '좌파 척결'과 '대한애국 궐기'를 외치는 어르신들의 기염에 등골이 몇 번 서늘해진 이후로는 아버지가 전달하시는 텍스트로 된 카톡은 '절대' 읽지 않았다. 사실 나의 이 좁은 소견은 이제 아버지의 중병 사태를 맞아 조금씩 고쳐가야할 습관이 되고 있다. 소스라치게 싫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이제 '겨울'의 문턱에 접어든 내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시간이다. 그런 분별력을 얻기 위해 지금껏 모자란 머리로 선현들의 수많은 고전들을 읽은 것 아니었는가. 글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문맥과 행간이며 이를 관통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암 진단 이전인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나의 응답은 '회피'였다. 나는 이 또한 가정의 '평화'를 위함이라고 판단했다. 그나마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 카톡 '친구'를 '차단'하지 않고 문자라도 받는 게 어디냐는 궁색한 자기변명도 내심 곁들였다.

그것이 정정하시고 그나마 꼿꼿했던 이 땅의 '태극기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아버지에 대한 내 나름 최선의 타협이라고 생각했다.




3.


내 가족 중 처음 겪는 암 선고를 보고 들은 후 아버지 입원 수속까지 마치고 오는 길에도 나는 실감나지 않는다. 그저 변함없이 아버지가 전달하시는 무미건조한 일방적 카톡 대화방에서 앞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을 것과 일을 하다가도 하루에 한 번은 안부전화를 드리고 집에서는 짧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겠다는 나의 뒤늦은 다짐만이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의 중병을 현실로 느끼게 한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고등학교 '철봉파' 불알친구들과는 밤새 술먹고 놀면서 왜 그간 내 아버지와는 일상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을까. 물론 아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반드시 아버지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했던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그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어느새 아버지는 여든 셋의 노인이 되어 있었고 이제 중병을 얻어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5년이 넘을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를 그 첫 기로에 서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가 새삼 보였다.


20대의 아들이 하라는 효도 대신 [자본론]을 읽던 그 시간에 보았던 50대 후반의 배관노동자 아버지는 그 힘들었던 1998년의 IMF 경제위기와 그 겨울을 아직 학생이었던 아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가장으로서 홀로 이겨내셨다.

이제 코로나 재난시대에 암이라는 중병을 얻은 80대의 아버지가 어려움을 이겨낼 힘은 그토록 말 안듣고 소원하던 하나 뿐인 아들인 내가 드려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라는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총생산의 그림은 다 그렸음에도 마르크스는 '상품'과 '화폐', '자본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의 '노동'과 '생산관계'를 개괄하고 분석 및 비판한 [자본론] 1권만 출간하고는 그곳에서 멈췄는데, 결국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무한정 착취하는 자본의 성장과 탐욕 앞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과 인간 사이 본래의 '물질대사'를 복원할 것인가 고민하며 '생태학'을 공부하느라 그랬단다. 사이토 고헤이는 1844년의 '파리노트'와 1851년의 '런던노트' 등 마르크스의 발췌와 수고 및 초고록들을 추적하면서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를 다시금 복원하고, 기후위기 시대인 지금의 '인류세'에서 [자본론]을 다시 읽고 쓴다고 선언한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더 이상 대안을 미룰 시간이 없단다. 머뭇거리며 자본의 성장주의를 방기했다가는 다음 세대에는 지구가 망할 수도 있으니 당장 자본의 '성장 제일주의'를 극복하고 대전환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연합체를 구성하자는 그의 말에 동조하든 말든,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는 한 줄 메시지는 뼈를 때리는 경구였다. 기후위기 '인류세'에 [자본론]도 다시 쓰는 마당에 한가하게 [자본론]에 빗댈 '효심'은 없다.

당장 내 아버지와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안부가 다급한 시간이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자본론]을 다시 읽듯,

또 다시 찾아온 아버지의 이 '겨울'을 새삼 세심하게 읽고 대처해야겠다.


나에게 말하고 글쓰는 법은 물론 밥먹는 법과 심지어 영어 알파벳도 알려주시고 운전도 알려주신, 아니 사람으로 사는 방법 그 모든 일체를 제일 처음 내게 가르쳐주신 내 아버지에게 다시금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 [자본론] 1권(1867), K. Marx,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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