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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10. 2024

[위로의 미술관](2022) - 진병관

- 그림으로 위로받다

그림으로 위로받다

- [위로의 미술관], 진병관, 2022.





여전히 '미술관' 시리즈다.

아마도 미술사 관련 책의 제목으로 출판사들이 뽑은 키워드가 '미술관'인 듯 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70


명화를 통해 역사를 읽어주는 김선지 작가의 [사유하는 미술관](2024)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중에 천천히 읽으려고 예전에 사두었던 프랑스 미술해설사 진병관의 [위로의 미술관](2022)을 잠시 들춰 보다가 역시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내게 '놀이터'와도 같은 미술사 책은 항상 그렇다. 넋 놓고 먹다가 어느새 바닥나 버린 과자와도 같이 아쉬움에 손가락을 빠는.

'Finger-licking good'이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화가들은 작품에 자의식을 담으려 노력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평면에 표현하는 방법을 사진술에 넘겨주면서, 다른 방식의 표현법을 찾은 것이다."

- [위로의 미술관], <1장.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는 날의 그림들 - 폴 세잔>, 진병관, 2022.



19세기 인상주의에서 20세기 현대미술로 넘어오는데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는 폴 세잔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상주의'는 프랑스 살롱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아카데미즘에 대항하여 개인전을 연 모네와 마네, 르느와르 등 일군의 화가들을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를 본 기득권 화가들이 사물의 '실체'가 아닌 '인상'만 그렸다는 비평이 곧 그들 화파의 이름이 된 것이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의 '시각예술(Visual arts)'로서의 그림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또는 미화시키면서까지 '본질'을 그리고자 했지만, 19세기에는 사진처럼 직접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상'은 말그대로의 '印象(Impression)'이 아닌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또 다른 표현법이 되었다.

망막에 비친 빛의 반사에 따른 일시적 풍경을 그린 '인상주의'의 대표화가 모네가 시시각각 변하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편의 연작으로 그린 이유다.



이처럼 '인상'이라는 '현상'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인상주의' 자체가 약 한 세기 이상 흐른 뒤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뮬라크르(Simulacre;흉내내다)'를 예고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현상은 언제나 '현재' 또는 '현대'를 뜻하는 '모더니즘'의 특징이다. 모든 '모더니즘'은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해 '후기' 또는 '말기'적 현상으로 전환되는데, '~이후' 또는 '부정'의 의미로 붙여진 '후기~'라는 개념은 해당 '모더니즘' 경향을 부정하는 동시에 연속되도록 갱신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8


'후기 인상주의' 거장 폴 세잔의 역할도 그랬다. 사과를 한 각도만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본 관점을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낸 실험은 오래전 르네상스 시대 전후 러시아와 비잔틴, 동양화풍의 '역원근법'의 왜곡에서도 보이기는 했지만 당시는 인류가 '원근법'을 익히던 시대였기에 아직 일렀다. 이제 19세기 말 세잔의 '사과(Apple)'는 뉴턴의 '사과'나 스티브 잡스의 '사과'만큼이나 미술사에서 혁신의 아이콘이 된다.

이후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적 색채와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적 관점은 폴 세잔의 '후기 인상주의'를 거쳐야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폴 세잔의 꾸준한 열정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젊은 화가들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한 수동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쿠르베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독립 전시회를 열었듯,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모더니즘 시대를 활짝 열게 된다."

- [위로의 미술관], <2장. 유난히 애쓴 날의 그림들 - 귀스타브 쿠르베>, 진병관, 2022.



인상주의 화가들이 기득권 살롱에 대항한 단체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귀스타브 쿠르베의 역할이었다.


19세기 '사실주의'의 대표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역시 당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대세였던 아카데미즘에 저항한 화가다. 실제하지 않는 천사를 데려오면 '사실'대로 그려주겠다고 장담한 쿠르베는 자신만만한 예술가였다. 여인의 나체를 그리스 신화처럼 미화하지 않고 너무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비판에 굴하지 않았고 후원자에게 간택받는 것이 아니라 화가 본인이 후원자를 선택했으며 결국 만국박람회장 맞은편 임시 건물에서 '사실주의 관'이라는 본인 개인전을 열면서 이후 젊은 후배 화가들에게 예술가적 자존심의 본보기가 되었다. 쿠르베의 이 '사실주의 관'에는 당대의 낭만주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가 한 시간 동안 관람했다는데, 신화와 역사화를 강조한 아카데미즘에 맞지 않게 사소한 개인적 소재를 크게도 그렸다고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쿠르베의 [화가의 작업실](1854~1855)을 들라크루아가 특히 극찬했다고 한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높은 자존감과 혁신적 도전은 유난히 애쓴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위로'가 된다.




"그녀는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라고 했고, 자신의 예술이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예술은 사회를 반영한다. 권력의 입맛에 맞게 순응하는 예술도 존재하지만,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예술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

- [위로의 미술관], <3장. 외로운 날의 그림들 - 케테 콜비츠>, 진병관, 2022.



'사실주의(Realism)'의 힘은 여기에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현실을 그리스-로마 신화적인 역사로 미화하는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쿠르베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를 그리지 않았고 당대의 현실을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려냈고 1871년 파리 코뮌의 민중혁명에도 가담하여 옥살이까지 한다.


19세기 말 독일 슐레지엔 직조공 파업을 새겼고, 20세기 들어 1,2차 세계대전으로 아들을 잃은 케테 콜비츠는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그림과 판화, 조각을 남겼다.



법학을 전공한 지식인이었지만 스스로 노동자가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19세기 여성이지만 미술가가 된 콜비츠는 평생 노동자와 빈민의 현실을 대변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삶을 살았다.


케테 콜비츠는 항상 노동자, 민중과 함께 했지만,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그녀는 언제나 고독하게 혼자 지냈다고 한다.

외롭지만 끝까지 민중과 함께했던 케테 콜비츠의 예술은 외로움으로 힘든 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짓이겨지지 않도록 '위로'를 보낸다.




"칼이 100여년 전에 남긴 그림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을 짓거나 따뜻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이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과 보내는 일상에 존재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위로의 미술관], <4장. 휴식이 필요한 날의 그림들 - 칼 라르손>, 진병관, 2022.



마지막으로 스웨덴 화가 칼 라르손의 그림은 무슨 사상이나 '주의(~ism)'를 말하지 않는다.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 그림을 배웠다. 변방의 화가로서 파리 미술의 중심에 머무는 대신 역시 화가였던 아내 카린을 만나 스웨덴으로 돌아와 '릴라 히트나스(작은 용광로)'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가족과의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을 그린다. 라르손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 카린은 집의 인테리어로 명성이 높아졌다는데 특히 라르손 가정의 인테리어는 북유럽 인테리어 브랜드인 이케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는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는 아내 에뷔테른의 질문에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릴 것'이라고 답했지만 모딜리아니의 삶과 사랑은 비극이었다.



반려견과 아이들을 친근하게 그린 찰스 버튼 바버의 그림들도 푸근하지만 그는 왕족과 귀족의 일상만 담고 있다.



그런 반면 칼 라르손의 그림들은 우리 일상의 접시와 찻잔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일상과 가족 안에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100년 전 북유럽의 그림이 새삼 보여준다.




역시, 휴식이 필요할 때는 내 힘의 원천, 가족 밖에 없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제일 알아주는 내 가족만한 '위로'가 또 어디 있겠는가.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9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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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의 미술관], 진병관, <빅피시>, 2022.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3542844915?afterWebWrite=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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