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에 오른 오대산 (노인봉- 소금강 코스 13.4km)
거북이의 속도가 대단해 보이는 이유
여름의 끝 자락, 가을이 빼꼼 자기 존재를 알렸던 9월 초 친구와 함께 강원도에 있는 오대산에 다녀왔습니다. 최근에 이직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던터라 지방에 있는 국립공원은 오랜만이었고 친한 친구와 함께 하는 산행이라 한껏 설렘을 안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장대비가 내린다던 예보가 무색하게 보슬비가 내린 오대산의 자락을 걸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는 미뤄왔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 생각보다 경사도 완만하고 쉬운데? 좀 더 속도 내서 걷고 빨리 도착해서 막걸리 마시자”
역시 입이 방정입니다. 한 5분 지났을까 갑자기 끝없이 계단 데크가 이어지며 우리는 점점 대화를 잃고 말았습니다.
난 지금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거야...1,2,3,4.. 1000. 천국의 계단이라고 정신승리했던 저는 무한 계단 앞에 얼마 오르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어떤 60대 여성분의 우아한 걸음에 시선이 머무른 건 그 때였습니다.
‘ 아 저 분 아까 저 밑에서 마주친 분인데 벌써 오셨다고? 엄청 느리게 올라가셔서 좀 답답했었는데.. 헉 저 속도로 안 쉬고 계속 오르셨던 거야?‘
머리를 꽝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저는 급한 성격 탓에 빠르게 스퍼트를 내서 오르다 금방 지쳐버린 우리 앞에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 분을 보면서요. ‘제 속도’를 알고 ‘꾸준히’ 오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구나, 산을 오를 때도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의 속도를 의식하고 내 속도보다 오버 페이스로 오르면 금방 지치고 탈이 나는구나. 지금 당장은 느려보여도 멈추지만 않으면 결국 정상에 오르게 되는구나. 어쩌면 초반에 빠르게 올랐던 사람들보다 더 빨리.
오래도록 그 곳에 있어줘.
그렇게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나아갔습니다. 지나가다 보이는 야생 꽃들에 눈길을 한 번 주기도 하고 잠시 멈춰 이름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보라색 꽃이 어딜가나 보여 궁금했는데 이름이 투구 꽃이라고 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투구를 쓴 장병처럼 온 몸을 비틀어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노인봉에 다다랐을 때 쯤 바위 사이 분홍빛의 꽃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척박한 그 돌 위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자태는 담백했고 단단했습니다. 바위에 꽃씨가 불시착했다 해도 정착할 틈을 찾고 그 안의 흙을 끌어안아 뿌리를 내린 이 꽃처럼 살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상황 탓으로 돌리며 쉽게 포기했던 못했던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비가 와도 좋아. 지금은 지금 뿐
비는 점점 거세졌고 바람은 차가웠습니다. 늠름한 나무와 우거진 숲 아래에 머물며 잠시 비를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걱정도 잠시, 툭툭 내리는 빗소리, 수년간을 지탱해온 녹음의 기운, 그리고 진한 흙냄새가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중산행의 맛. 오늘 비 예보에 괜시리 마음이 설렜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숲은 더 초록색을 띠고 흙은 자기 존재감을 더욱 내뿜습니다. 일정한 리듬감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고요. 여기에 운무가 살짝 내려앉으면 게임 끝. 운무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좋았습니다. 온전히 오감을 열어놓고 한 걸음 내딛으며 이 공간,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오늘도 역시 완벽한 우중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