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가 이룩한 성취 중 하나를 꼽으라면, 대학의 발명일 것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목적과 성격은 신 → 이성 → 국가 → 경쟁력 → 자본으로 그 초점이 이동돼왔다. 그럼에도 대학은 예나 지금이나, 일상과는 다른 언어로 세계를 사고하고, 이성과 감성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는 ‘특별히 허락된 세계’로 존재한다. 눈앞의 현상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때로는 발명하며,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 그것이 대학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2.
최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AI를 활용한 집단 커닝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AI 부정행위가 6,900건 이상 적발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온라인 강의·비대면 수업의 구조적 허점을 지적하고, AI 활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마련하지 못한 대학 행정의 무능을 탓하며, 온라인 강의로 수백 명의 등록금을 손쉽게 받는 학과 운영 방식의 무성의를 비판한다.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을 바라보는 실용주의적 관점, 그리고 대학 본질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취업기계 양성소’, ‘졸업장 발행기관’으로 기능해왔다. 입학은 어렵고, 졸업은 쉽다. 학생들은 입학 전까지,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주어진 문제를 풀어내는 ‘입시 기계’로 길러진다. 대학에 들어오면 어떤가? 전공 공부는 성적을 위한 최소한의 투자로, 시험 기간 벼락치기가 거의 전부다. 전공의 의미는 이미 희미해졌다. 대학은 ‘공부하지 않는 학생’을 배출하는 기관이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그저 취업을 위한 학력 인증 기관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할 실전 인력을 제대로 양성하는 것도 아니다. 상아탑의 근본 취지에 부합하는 깊이 있는 연구 실천이 강화된 것도 아니다. 이 어정쩡한 회색 지대에서 대학은 점점 외부 기관 대비 경쟁력을 잃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사회에 나가기 위해 별도의 학원 수업을 듣고, 대학 교수보다 외부 강사에게 의존하며, 전공과 무관한 다양한 직업인들을 찾아다닌다. 애석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최근의 집단 커닝 사태는 이런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대학은 그저 학점이나 잘 따면 되는 곳인가? 사회에 좀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한 졸업 자격증 발급기관인가? 대학의 역할과 대학생의 학업 목표가 바로 정립되지 않고선 지금의 부정행위는 지속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대학은 인간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 창조적 인간이 가진 힘과 그 힘이 만들어갈 세계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한다.
3.
수 년전 난, 대학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분명한 원칙을 세워 두었다.
1) 시험은 반드시 대면으로 본다.
2) 개념 학습이 필요한 요소는 학점 반영 없이 여러 차례의 쪽지시험으로 점검한다.
3) 지식을 실제로 적용하는 응용 레포트를 제출하게 한다.
4) 최소 1~2회의 조별 토론을 시행한다.
(*레포트 작성과 조별 토론에서 AI 활용은 허용하되, 반드시 개인의 실존적 경험과 해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사실 AI로 작성한 글을 100% 걸러낼 수 있는 교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다만 의심스러운 경우 개별 면담과 구술 평가, 또는 교수 앞에서 직접 작성하게 하는 방식으로 조금 더 나은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학기부터 적용을 고민 중이다.)
나는 수업에서 오히려 AI 활용을 장려하는 편이다. 리서치 단계에서는 마지막 진위 검토를 반드시 거치게 하고, 이미지·음악 등 다양한 기호를 활용해 의미를 생산하는 작업에서도 AI 활용을 허용한다. 단, 중요한 것은 ‘도구의 활용’이 아니라 명확한 의도와 각자의 실존적 해석이다.
4.
고려대에서 ‘응용기호학’이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벌써 한 학기가 마무리되어 간다. 기호학과 언어철학을 기반으로 브랜드 전략을 가르치고, 기호학적 관점에서 브랜드·마케팅·디자인 언어를 해석하고 생산하는 실사구시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다. 지난 학기까지는 기말고사를 조별 기획 프레젠테이션으로 대체해 왔다. 발표가 우수한 조에게는 엘레멘트컴퍼니의 전략·디자인 파트 인턴십 기회를 제공했고, 지금까지 약 30명 가까운 학생들이 인턴을 거쳐갔다.
그러나 지난 학기, 조별 과제에서 노골적으로 ‘무임승차(horse-riding)’하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데, 국적에 무관하게 무임승차하는 학생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기말고사까지 보기로 했다.
학생 개개인의 논리력, 참여도, 성실성, 이론적 역량은 이미 중간고사·발표·간이 레포트·조별 토론·질의응답을 통해 파악했다. 그렇기에 기말고사에서 무엇을 평가할지가 고민이었다. 기말고사는 12/19인데, 시험 문제는 지난주 미리 공지했다. 충분히 생각하고 연습해서 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문제는 딱 2문제다.
문제 1
『도덕경』 제1장을 1) 전체적으로 해석하시오(해석 문장을 모두 기술할 것). 2) 해석된 내용을 기호학적 관점에서 논하시오.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을 활용하여 『도덕경』이 보여주는 특정 의미 구조를 도식화하고, 그 구조가 오늘날 의미 해석 및 생성 방식에, 그리고 각자에게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지 서술하시오.
문제 2
‘기호학적 삶(Semiotic Life)’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고,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의미에 휘둘리지 않고 의미를 성찰하며 살아가기 위해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논하시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본인이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교훈을 함께 서술하시오.
5.
『도덕경』 1장은 수많은 학자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해석해온 텍스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학부 시절, 『도덕경』 전체를 두 번 정도 필사하며 제법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왕필본을 기반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왕필류의 해석은 1,700여년간 헤게모니를 장악해왔다), 왕필이 도덕경을 주해한 나이가 14세였다고 한다. 아무리 당대 명문가의 학자로서 논리력과 필력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14세에 세상의 흐름·이치·군주의 처세에 대한 깊이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나, 개인적으로는 왕필의 해석에 다소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의 끊어 읽기 방식을 따르는 많은 현대 학자 중 상당수가 『도덕경』 해석을 위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나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무리하게 끌어오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기독신앙의 하나님을 끌어오는 류영모, 함석헌식의 해석도 적지 않다. 그런 해석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나, 노자가 살던 시대의 순수 문헌학적 관점의 성실한 해석이 아쉽다. 철학적 해석은 종종 원래 쓰이던 단어의 의미 맥락과 수사학적 질서를 간과하고, 형이상학적 추상 개념만으로 해석을 전개하고 있어, 이 역시 스스로는 경계하는 편이다.
나는 이 영역이 전공도 아니기에, 특정 해석이 ‘옳다’고 가르칠 역량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그럴 마음은 없다. 오히려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기호학이란 원래 그런 학문이다. 의미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의미의 파시즘을 넘어서려는 태도, 그것이 기호학이 제안하는 근본적 세계관이다.
『도덕경』을 기호학적 태도를 논하는 문제를 출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력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기 바라고, 무엇보다 도덕경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 살아가면서 반드시 마주하게 될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시험을 통해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 개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소화한 흔적을 보고싶다. 소화력이 다르니 해석도 분명 다를 것이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만 하더라도 최소 서너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최소한의 텍스트 해석은 해줘야 도리인 것 같아, 이번 주 수업은 『도덕경』 강의로 준비하고 있다. 예전에 읽지 못했던 다양한 주해본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읽고 있다. 최근에는 성격이 다른 10권의 주해본을 확보해 비교하고, 과거의 내 해석을 수정하고 있다. 하나의 가능한 독법을 제시해볼 생각이고, 학생들의 새로운 해석도 기대하고 있다. 기말고사가 이렇게 기다려지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