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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04. 2024

파인애플 세포의 탄생

어느 하루의 이야기



파인애플.


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 몸속에 청량한 라임 빛깔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서글픈 날이면 문득 파인애플이 떠오른다.


파인애플을 처음 마주한 때는 아마도 1992년 여름 즈음이다. 사막을 한참 동안 건너 가면 나타난다는 나라에서 일하던 먼 친척 - 중동 삼촌이라고 불렀던 - 이 파인애플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까만 비닐봉지 속에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있는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인간이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먹음직한 숱한 과일을 두고서 굳이 저런 괴물딱지 같은 것을 먹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다지 맛도 없어 보여서 나는 ‘온 가족 파인애플 특별 시식회’ 자리에 가담 치도 않았다. 정말 맛있다는 형의 얘기는 평소처럼 날 골탕 먹이려는 함정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혼자 집 밖으로 나왔다. 해 질 녘, 중동 삼촌이 떠날 때까지 기르던 강아지 까미와 놀았다. 끝내 파인애플 따위에 굴복하지 않은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날 꿈에 나는 낙타를 타고 밤의 사막을 건넜다. 총총한 별을 따라 모래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니 기특하게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동그란 물가를 따라 전봇대 같은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거기에는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만화영화 속 허클베리 핀처럼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은하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별 하나 건져오듯이 파인애플을 따서 품에 안았다. 까슬까슬했다. 마치 그림 별의 뾰족한 부분처럼.


모래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파인애플을 한참 노려봤다. 그제서야 나는 ‘온 가족 파인애플 특별 시식회’ 불참을 후회했다. 이걸 어떻게 먹는지라도 봐뒀어야 했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눈물이 맺힌 채로 잠에서 깼다. 새벽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아직 꿈 속이었다. 다들 룹알할리 사막 어딘가에서 또 나를 빼고 파인애플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분통이 터졌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 일어나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했다. 시곗바늘과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개미 발자국 소리 정도만 나도록 냉장고 문을 열었다. 환한 빛과 함께 세상에서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향이 쏟아졌다. 랩에 싸인 노랗고 푸른 것을 꺼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파인애플 몇 조각을 남겨둔 것이었다. 비닐을 벗기자 향이 더 짙어졌다. 촉촉한 감촉이 신기했다. 크게 한 입 우적 베어 물었다. 입 안에서 달콤한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파인애플이란 이런 것이구나. 이것이 파인애플이구나! 그 순간, 내 안의 세포 하나가 파인애플에게 영원을 서약했다.


그렇게 태어난 내 ‘파인애플 세포’는 지금도 별이 가득한 사막의 밤을 떠돌고 있다. 아아, 먹고파라. 파인애플.


2024. 3. 4.





*별 관련 없는 내 책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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