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완일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지난밤, 아무도 없는 집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보았다. 음악가 김목인의 노래 ‘그게 다 외로워서래’가 떠올랐다. 포유류는 뇌 속의 변연계가 공명을 일으킬 대상을 찾지 못하면, 외로움에 휩싸인다. 외로움은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움은 아름답고 고통스럽다. 그저 고통일 뿐이라면 쉽게 떼어놓을 수 있으련만, 아름답기 때문에 쉽게 놓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 채, 한 없이 외로워진다. 무한히 깊은 우물에 빠진다면 출구의 빛은 마치 135억 년 전의 빛처럼 작아질 것이다.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태에서 사방의 동그란 벽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빛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소리가 빛이 되고, 출구가 된다. 당신, 거기 있습니까. 거기 있지요. 내가 갈게요. 해마다 여름이면 당신을 만나러 올게요.
나는 수년 째, 아무도 없는 집속에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까닭 없는 그리움의 정체를 탐구하고 있다. 오래된 소파에 기대어 밤이 검게 물들고, 아침의 금빛이 차오르는 광경을 가만히 본다. 쉴 새 없이 차들이 달리고,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동안, 씨디플레이어의 음악은 켜졌다 꺼지고, 다시 켜지기를 되풀이한다.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인생이란 방금 켠 한글 프로그램의 백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내가 한 달 내내 야근을 하며 그 백지를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은 바뀌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가끔 어떤 슬픔과 어떤 분노는 소나기처럼 갑자기 내게 쏟아진다. 왜일까.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서로 인과의 끈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미시적 차원에서 무엇이 원인이었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거시적 차원에서 뇌가 허용하는 범위 내의 원인을 수색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모든 일의 원인일까. 사람은 원인을 통제하여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일까.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면 허무에 침식되고 만다. 사는 게 무의미해지고, 어떤 노력도 쓸모 없어진다.
해마다 여름이면 당신을 만나러 올게요.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유성아(고민시)가 말한다. 에너지엔 선악이 없다. 유성아는 한낮의 더위처럼 펄펄 끓는 생명력을 지녔다. 그녀는 치열하게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관철하고자 한다. 신기한 일이지. 어떤 사람은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단 하나 빈 곳에 굶주려 살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 없이도 모든 걸 가진 듯이 산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그게 다 외로워서 그렇다. 우리가 포유류가 아니었다면, 외로움도 없고, 그리움도 없고, 홀로 캄캄한 밤하늘의 별빛을 보다, 우주를 떠올리거나, 시간의 맨 처음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지도, 에세이나 소설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민시 배우의 연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토록 아름다운 악이라니. 그이가 여름마다 내게 온다면 나는 기꺼이 악마와 손을 잡으리라. 드라마 <5월의 청춘> 속 역할 ‘김명희’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을 탁월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김명희와 유성아는 정말 정반대의 인물일까…. 요즘 사람들은 선과 악을 간단히 구분 짓기를 바란다. 선에는 악이 없어야 하고, 악에는 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다는 댓글에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집속에서 나는 악일까, 선일까를 생각한다. 어제는 하루 종일 데굴거리며 게임을 할까 말까 따위를 고민하다 하루를 소모했으니 악에 가까웠다. 오늘은 새벽부터 착실히 글을 쓰고 있으니 선에 가깝다. 순전히 내 기준이다. 외로움에 빠진 우린 모두 아무도 없는 집에 있는 것과 같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쉽게 악에 물든다. 그래서 공자는 <중용>에서 신독(愼獨)을 말했다. 홀로 있을 때, 의로움을 택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다. 나는 늘 선에 이르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어느 날 고민시 배우가 찾아와 함께 빈 집에 불을 지르고 다니자고 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 같다. 군자가 되어 뭣하랴, 기왕이면 평생 직업으로도 나쁘지 않겠다. 한여름엔 좀 덥겠지만.
2024.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