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no. 46
커피 원두가 없어서 믹스커피를 마시며 쓰는 이 글이 어디로 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원두커피만 마시는 내게 믹스커피 한 자루가 어디서 생겨 났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명확하다. 최근 온라인 중고거래앱에서 닌텐도 스위치용 게임을 하나 구입했는데, 거기에 감사 선물로 딸려 온 것이다. 고마움을 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주말에는 모처럼 집 밖으로 나서 낯선 장소를 방문했다. 다양한 열차들이 스쳐 지나는 모습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까페였다. KTX부터 공항전철, 경의중앙선, 경춘선 청춘 열차까지 다양한 열차가 지났다. 이따금 신호대기를 위해 멈추는 일도 있었다. 어릴 적 은하철도 999나 토마스 열차에 영혼을 바쳐본 경험이 있는 철덕이라면 하루 종일 머무를 수 있을 까페다.
나는 그곳에서 ‘제리’라는 인물을 만났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곤충체집을 나온 소녀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꽤 묵직해 보이는 배낭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알 수가 없어 약간 경계심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내 친해져버리고 말았다. 제리 님은 얼마 전 춘천 여행을 했던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작년 이맘때 춘천 여행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철길 떡볶이라는 유명한 음식점을 지인이 운영한다는 얘기도 몹시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까워진 건 까페에서 일하고 있던 두 남녀의 관계를 심도 깊게 추리하는 과정을 통해서였다.
친해진 김에 나는 제리 님의 가방 속을 보았는데, 다행히 망치나 톱, 혹은 권총, 또는 전기 충격기 같은 것마저 없어서 안도했다(조금은 실망했던가). 의기투합한 우리는 인근 수제 피자가게에서 생애 최고의 피자를 점심으로 먹고, 뙤약볕 속에서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 ‘용산가족공원’이라는 한 글자도 재미없는 이름의 공원 앞에 도착했다. 다만, 지도앱에 숲이 보여서 온 것뿐이었다.
제리 님과 나는 별다른 기대 없이 그늘이라도 찾으려고 공원 안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자 용산가족공원이라는 하품 나오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따지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공원은 장엄한 풍광을 자랑했다. 서울의 한 복판에 있을 법한 숲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지가 광활했고, 나무는 울창했다. 마치 제주도의 사려니숲 같은 분위기였다. 내게 다시 이름을 지을 권한이 생긴다면, 바로 옆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이디어를 빌려, ‘시간과 사유의 숲’이라고 짓겠다.
제리 님과 나는 마치 갑자기 그 숲에 단 둘이 떨어진 시간여행자들처럼 조용히 숲길을 걸었다. 우리가 정말 시간여행자이고, 숲에 도착한 뒤 기억을 잃은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어느 바다의 한 곳에서 타임슬립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배는 어떤 시간대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먼 과거, 혹은 먼 미래에서 헤어진 우리가 다른 시간대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은 어쩌면 다 그런 걸지도 모른다. 다른 차원, 다른 시간, 다른 전생에서의 약속들이 지금 서로를 만나게 하고, 또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우리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뭔가를 결정하고 변화시킬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저기 나비가 있어요.”
제리 님이 말했다. 귤색에 가까운 노랑빛의 날개를 지닌 나비였고, 호랑이 무늬가 있었다. 저게 노래로만 듣던 그 호랑나비인가. 커다란 숲에서 작은 나비를 발견한 제리 님에게 나는 감탄했다. 역시 복장만 곤충체집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호랑나비를 따라 숲의 깊은 곳으로 걸었다. 바람이 살랑였다. 가을 냄새가 풍겼다. 올해도 이제 3개월 남았다는 제리 님의 말에 별 의미 없이 사라져버린 나의 하루들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릴 수도 없었다. 하루 안에 아무 내용이 없었으므로. 언젠가 굳이 2025년을 떠올린다면 호랑나비를 따라 숲의 깊은 곳까지 걸어갔던 해로 기억할 것 같았다.
호랑나비가 안내한 길의 끝에는 낡은 기차역이 있었다. 우리는 지쳐서 그곳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제리 님은 아이폰의 건강앱을 켜서 2만보나 걸었다고 감탄했다. 하늘이 참 맑고 깨끗했다. 마음 속의 지저분한 것들이 이런 청정 구역에서는 못 살겠다며 저절로 짐을 꾸려 떠나는 느낌이었다. 홀가분했다.
우리가 앉아 시시껄렁한 말을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적당한 채도의 황금빛이 숲과 길과, 플랫폼과 우리가 앉은 벤치를, 또 나란히 뻗은 다리와 네 발을 비췄다. 착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신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간지러웠다. 제리 님도 그런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떠나온 어느 시간의 바다로 돌아가도 좋고, 여기 이대로 오래 머물러도 좋겠다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2025.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