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자의 인생 1막 회고록
패션디자이너라고 하면 다들 티브이에 나오는 멋진 명품옷에 주얼리에 진한 화장을 하고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처럼 잘 못 나가는 디자이너들도 있다. 오늘은 그 얘길 해보려고 한다.
난 산디과를 졸업하고 캐릭터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패키지 디자인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렇게 패키지 디자이너가 되었다. 당시에는 그 분야의 회사가 많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 선택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말하면 다 알아듣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지금 말하면 계기라는 게 정말 이해되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소심한 “I”인 나는 옷매장에 들어가서 옷을 사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고 어느 날 나를 무시하는 점원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시를 당할 바에야 아예 내가 이 속으로 들어가서 디자이너가 되면 나 스스로 당당해지겠지?’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어이없는 계기지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좋아했고 집에 있는 재봉틀로 옷도 만들어 입고 달마다 패션잡지를 정독하는 게 취미였으니 심하게 황당하진 않은 계기일지도…..
그렇게 패션학원을 하루 2타임을 들으면서 남들 1년 하는 공부를 6개월에 마치고 드디어 패션회사를 입사하게 된다. 그때당시 정보도 없고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도 없다 보니 막연하게 면접을 보고 내가 당시에 좋아하던 브랜드와 거래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프로모션이란 곳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패션디자이너라고 하면 막연히 드라마에 나오는 디자이너 혹은 백화점이나 매장등이 있는 브랜드 디자이너 그리고 동대문 디자이너 이렇게 있다고만 생각한다. 당연하다. 나조차 그랬으니까…그래서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대기업 브랜드에서 일하는 게 그렇게 부럽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 업체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무시당하는 브랜드 일지라도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못 들어가서 난리인 브랜드라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브랜드들의 샘플이나 생산을 해주는 하청업체의 개념인 프로모션 업체들이 있고 거기에 소속된 디자이너들이 있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들을 생산디자이너라고들 부른다. 아직도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생산부가 아닌 영업부도 아닌 생산디자이너라니….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품평 샘플을 만들고 메인이 픽스가 되면 생산투입을 하고 부자재를 발주하고 그렇게 본사라고 부르는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손발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무시받는 이유는 학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같이 일하던 유학 다녀온 언니를 사장이 브랜드에 넣어주는 걸 보고는 확신이 들었고 유학을 가지 못한다고 하면 학교라도 다시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자존심이 바닥을 치고 몸이 말이 안 되게 아픈대도 불구하고 병원 갈 시간도 없이 일을 무리하게 하다가 정말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나빠졌고 그럼에도 병원 가 있는 나에게 소리 지르는 사장을 보고 퇴사를 결심했다. 지금생각하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고 정말 고발도 가능한 일이지만 20년 전인 그땐 그랬다.
야심 차게 새로 여성복을 론칭한다던 회사에 들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회사였고 당시에 사스가 유행을 하면서 중국 수입이 막히면서 결국 신사동에 매장 하나 내는걸 마지막으로 회사는 문을 닫았다.
생각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패션과 편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글에 자세히 쓰겠지만 우리 집은 당시에 흔하던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한 집이었고 여자인 나에게 지원을 해주실 엄마가 아니었다. 그래도 매달렸다. 울면서 입학금 한 번만 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결국 허락해 주셨고 난 미친 듯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패션과 에 합격했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공부했고 고향에서 부모님 집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안정도 되고 행복했다.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남들이 과제 5개를 해오면 난 20개를 해가면서 그렇게 공부를 했다. 과탑도 하게 되고 장학금도 받으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내 나이 30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종 공모전이란 공모전엔 다 공모를 했다. 내 실력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그것뿐이었다. 운이 좋아 몇몇 공모전에 입상을 하고 패션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부산패션대전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다. 무대에서 최종대상에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내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 혼자서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들도 아직 생생하다. 앞으로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너무 기대되고 내가 정말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생각이 오버랩되면서 웃다 울다 그랬었다.
여담이지만 그때 받았던 200만 원의 상금은 나에게는 단돈 10원도 쓰지 않고 모두 가족들 선물 사는데 썼다. 아직도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했지만 내 인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대기업에 몇 차까지 면접에 붙긴 했지만 당시에 개인적인 일들이 겹치면서 엄청난 프레셔로 인해 공황장애가 생겼고 그렇게 대기업은 고사하고 백수가 된다. 하루 쉬면 쉰만큼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급하게 온라인쇼핑몰 브랜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온라인 브랜드 디자이너지만 작은 브랜드라 정말 할 일이 많았다. 디자인은 기본이고 프로모션을 쓰지 않고 직접 모든 걸 다 하기 때문에 프로모션이 해주는 업무까지 모두 디자이너가 하는 구조다. 보통 작은 브랜드에 디자이너들은 프로모션업체의 업무에 디자인과 유통업무가 추가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렇게 나는 디자인, 원부자재 수배발주, 공장관리, 패킹, 택배발송, CS모델촬영업무보조에 쇼핑몰배너작업까지 했다. 매일매일이 야근이었다, 일보다는 사장님의 폭언에 시달리다 결국 퇴사를 하게 되었고 마지막날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사장님 그렇게 직원들에게 폭언을 하시게 되면 좋은 직원들 다 떠날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좋은 사람들 떠나지 않게 조금만 참아보세요…”
이 말이 훗날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모른 채 실언을 하게 되었고 그날 사장님은 엄청 심하게 욕을 하시면서 저주를 퍼부으셨다고 한다.
그 후에는 이 회사와 비슷한 업무를 하는 온라인브랜드를 거쳐서 부도난 브랜드를 인수받으신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작은 브랜드에서 일하게 되었다. 예전엔 꽤 잘 나갔던 브랜드였었다고 했다. 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구색은 갖춰서 샘플실에 엠디에 유통사업부에 공장에 생산부까지 갖춘 곳이었고 시즌마다 매장 매니저들을 위한 품평도 진행했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주말마다 백화점을 돌면서 시장조사를 해야 했다.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디자이너 자체를 관두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한 백화점 시장조사. 시장조사는 말 그대로 백화점에 걸려있는 옷들을 서칭 하는 일이다. 지금이야 온라인상에 모든 옷들이 자세하게 디테일까지 나와있지만 예전엔 그 모든 작업을 디자이너들이 백화점을 돌면서 직접 했다. 우선 매장에 들어가서 한번 옷을 둘러보고 서칭 해야 하는 옷을 고른 뒤에 탈의실에 들어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펼친 사진, 디테일사진, 착장 앞, 뒤 사진, 케어라벨 등등 모든 정보를 다 사진에 담아야 한다. 뭔가 시간이 지체되는 게 느껴지면 매장 매니저가 문을 똑똑 거린다 “도와드릴까요?”. 정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떨리는 순간이다. 괜찮다고 둘러대고 재빨리 탈의실을 나선다.
당연히 옷이 별로인 것 같다며 다시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하고 다시 탈의실에 들어가 아까 찍지 못했던 사진을 다시 찍는다. 그러다 갑자기 디카 플래시가 터지거나 핸드폰 카메라 소리가 나거나 해서 쫓겨나기도 한다. 그리고 점점 매니저들이 얼굴을 알아보다 보니 서울이 아닌 외각으로 빠져서 백화점에 가야 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어떤 이는 몰카를 샀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렇게 나는 주말마다 몰래 옷사진을 찍었다. 남자 친구이나 아이를 데리고 가면 의심을 덜 받다 보니 데이트도 백화점에서 친구를 만나도 백화점에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는 자세히 보고 화장실에 가서 도식화를 그렸다. 디테일이 생각나지 않아 5번넘게 들락날락했던 적도 많다.
그렇게 나는 몰카를 찍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게다가 이건 아직까지도 많이 성행되는 일이긴 한데 브랜드의 옷을 구매한 후에 패턴을 뜨고 다시 반품을 한다. 가끔은 디자인실에서 돌아가면서 옷을 사고 패턴을 뜨고 돌아가면서 반품을 처리하러 백화점에 간다. 정말 미치게 창피한 일이었다.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 때문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견디지 못하고 관두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봤다. 그리고 시장조사 때문에 프로모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정말 티브이에서 보던 거나 상상하던 것과는 천지 차이 아닌가??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이 브랜드는 결국 망하게 되었다. 자체디자인은 관두고 사입으로 방향을 돌린다고 했고 디자인실은 없어졌다. 그러다 정말 특이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브랜드디자인기획 업체였는데 말 그대로 당시에 한국과는 다르게 디자이너들이 부족한 중국 브랜드에 디자인기획만 해주는 업체였다. 정말 많은 디자인을 했다. 모든 복종을 다루었다. 특히 생산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디자인은 너무 재미있었지만 결국 중국에서는 그런 기획의 노하우를 너무 빨리 습득해 버렸고 더 이상 디자인에 돈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당시 사장님께서는 유명한 브랜드를 정말 많이 만드신 분이시라 그분 밑에 있었다고 하자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드디어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내셔널브랜드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인생은 얄궂은 것 같다. 좋은 것도 잠시 이상하게 실장이 나에게 갑질을 해댔다.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고 꽤 이상한 실장들과 많이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예전에 내가 조언이랍시고 말을 남기고 나왔던 회사의 사장과 나에게 갑질하는 지금 실장이 정말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는 사실을…. 아 내가 잘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작정을 하고 괴롭혔던 것이었다.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난 절대 회사에선 퇴사를 하면서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는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많더라고 수고하셨고 감사했다는 말 외엔 하지 않는다. 참 세상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뭔가 타이틀 따위 얻는 게 무의미해졌고 무작정 동대문 디자이너로 도전하게 되었다. 동대문 디자이너는 조금 더 공장관리를 잘해야 하는 종류의 디자이너였다. 본인이 알고 있는 공장이 있어야 유리했고 당연히 내가 알고 있던 공장들은 브랜드특화 공장이라 단가가 맞지 않았고 위치도 맞지 않았다. 내가 하던 곳은 아침에 발주를 넣으면 저녁에 매장에 옷이 풀리는 구조여서 적어도 오토바이로 왔다 갔다가 가능해야 하는 위치가 유리한 곳이었고 알던 공장을 쓸 순 없었다. 사이트를 뒤지고 연락을 하고 해서 겨우겨우 공장 몇 개를 수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패턴을 공장에서 떴고 따로 패턴의뢰 같은 걸 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마 단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동대문 고가 브랜드에서도 일을 했는데 거기의 구조는 일반 브랜드의 구조와 동일했다. 그런데 저가의 경우에는 원단도 패턴도 심지어 부자재도 정말 저가를 써야 했고 당시에 내가 디자인하던 곳들은 정말 디자인만 그럴싸한 내가 디자인했다고 말하기도 창피한 퀄리티의 옷들이었다. 결국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동대문 디자이너도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쇼핑몰이니 오프라인 매장이니 혼자 해보겠다고 의욕적으로 덤볐다가 빚만 잔뜩 지고 결국 다시 프로모션 회사로 들어가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나처럼 못 나가는 디자이너들도 많을 것 같다. 이런 이름이 있었나 싶은 이름의 브랜드 디자이너들도 있고 동대문 디자이너들도 있고 온라인쇼핑몰 디자이너들도 있고 디자인을 안 하는 프로모션 생산 디자이너들도 있다. 다들 유명한 이름의 디자이너가 되어서 백화점에 내 옷이 걸리는 상상을 하며 도전하지만 유학을 가지 않거나 피팅이 되지 않는 디자이너들은 정말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야근에 지치고 실장의 폭언에 지치고 시장조사에 지치고 오르지 않는 월급에 실망하다 결국 이 업계를 떠나는 사람을 정말 무수히 많이 보았다.
이 일을 시작한 건 벌써 20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일을 하는 사람은 주위에 나 하나밖에 없다. 나와 같이 시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직을 했거나 결혼을 했거나 일을 관두었다. 어떤 친구는 디자이너를 관두고 행복해졌다고 했다. 그렇게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난 아직 꾸역꾸역 하고 있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하고 있을 것 같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내가 디자인한 옷이 매장에 걸린 걸 보거나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걸 보는 거다. 그 순간을 위해서 일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글쓰기와 패션만이 유일하게 돈을 벌게 해 준 거라 아직도 미련하게 붙들고 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