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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06. 2024

갈수록 잔인해지는 K-콘텐츠가 우려스러운 이유

'더 에이트 쇼'로 본 K-콘텐츠의 신경향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The 8 Show>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습니다.


<The 8 Show> 예고편 캡처

지난달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던 <The 8 Show(더 에이트 쇼)>는 비록 큰 화제가 되지 못했으나 꽤 수작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초대되는 8명. 이들은 1층부터 8층까지 각각 한 층씩 배정받는다. 8명이 이 공간에서 오래 버틸수록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이들은 서로 협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서서히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 각자 공간도, 시간당 버는 돈도 모두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다. 마치 계급 사회의 축소판 같은 이곳에서 8명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 쓴다. 아래부터는 시리즈 내용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으므로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The 8 Show>는 꽤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의 계급을 풍자한다. 타고난 자산 덕에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누리는 '8층(천우희)'과 인간적 존엄을 버려가며 발버둥 쳐야 가까스로 생존하는 '1층(배성우)'까지. 이 작품에 이르러 한재림은 마치 부조리한 지금 사회를 한 편의 우화로 풍자하겠다는 듯, 치밀한 설정과 촘촘한 각본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더 킹>(2017), <관상>(2013) 등을 통해 휘청이는 권력 구조를 찌르기 좋아헀던 한재림의 역량이 총동원된 것 같다. 작품만 놓고 보자면 는 현실과 픽션 사이, 그 어디쯤 적절한 곳에 자리 잡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하지만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여태 한국의 콘텐츠에서 엿보이던 어떤 패턴이 에서 다시 반복될 때, 이 작품 안에서만 머물기란 어려운 일이다. <The 8 Show>에는 최근 한국 콘텐츠의 특징이라 할 만한 점이 드러난다.


먼저 지나치게 잔인하다. 인물들이 서로 다툴 때, 누군가를 괴롭힐 때. 이 작품은 불필요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선보인다. 보여주지 않아도 서사 전달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굳이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The 8 Show>는 마치 잔인함이 이 시리즈의 자랑인 것처럼, 수시로 그것을 내세우는데 거리낌이 없다.


스토리 전달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폭력적인 장면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 것이 콘텐츠의 기본적인 태도임을 고려할 때 이런 부분은 이상하다. 캐릭터뿐 아니라 관객까지 가학적으로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유희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8층'과 '6층(박해준)'을 비판한다. 그런데 과연 이 시리즈는 그들과 다른가?


또한 <The 8 Show>는 지나치게 비참하다. 인물을 괴롭혀 비참한 정서를 짜낸다. 주된 타깃은 '1층'과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다. 그만큼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참함을 필요 이상으로 전시하는 부분이다. 얻어맞은 신체, 울부짖는 목소리. 불쌍함을 위시하며 시청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 말이다.


<The 8 Show>는 인물이 처한 비극을 다루며 시청자의 말초 감각에 호소하는 데 몰두하는 나머지, 때로 절제되고 정제된 표현이 시청자의 감정을 파고들 수 있음을 놓치고 만다. 거침없이 잔인하고 비참한 <The 8 Show>는 마치 캐릭터를 두고 진행하는 동물 실험 같다.

<오징어게임> 예고편 캡처

그런데 한국 작품에서 이런 경향이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이나 <기생충>(2019)처럼 해외에서 많이 찾은 작품일수록 이런 특징은 두드러진다. 한국 작품이 잔인하다는 인식이 이미 퍼지고 있다.


<The 8 Show>는 이런 작품들과 궤를 함께한다. 이들은 물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폭력적이다. 잔인하게 괴롭히고, 계급적으로 비참해진 인물을 담는다. 또한 한국 사회의 계급도를 펼쳐, 인간이 아득한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여주는 데 몰두한다. 물론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폭력의 강도와 필요성,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가학을 통해 비참을 끌어내는 부분에서 느슨하게 공통점을 보인다.  


이런 점은 무척 우려스럽다. K-콘텐츠의 특징이 '잔인함'으로 자리 잡는 일 말이다. 전 세계 시청자, 그리고 우리 스스로 K-콘텐츠의 정체성이 잔인함에 있다고 느낄 때, 한국에서 탄생하는 작품은 점점 더 큰 폭력을 난사할 수 있다. '원래 그렇다'는 인식은 반성 능력을 약화한다.


특히 해외에서 반응을 기대하는 기획 작품일수록, 이런 경향은 강해질 것이다. '요즘은 이런 게 먹힌다'며 필살기를 쓰듯 잔인한 장면을 구사할 확률이 높다. 이건 과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런 경향이 이어질 때, 그 결과를 오롯이 감당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다. 해외에서 성공했거나, 성공을 노렸지만 실패했거나, 그래도 되는 줄 아는 가학적인 작품이 한국에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상상은 끔찍하다. 예술은 이렇게 망가지곤 한다.


한 지역의 작품들이, 그곳의 토양에서 우러난 특징을 공유하는 일은 멋지다. 이런 특성이 그 지역의 시그니처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좋다. 마치 지역 특산품처럼. 하지만 몇 개의 성공한 작품이 어떤 경향을 주도하고, 뒤이은 작품들이 그런 경향을 반성 없이 따라 하는 것은 좀 다른 일이다. 특히 그것이 '폭력성'처럼 조심해야 할 특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잔인함은 K-콘텐츠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이미 한국의 창작자들도 인지하는 부분이겠지만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우리는 한국 작품이 잔인함으로 주목받는 현상에 대해, 소위 '국뽕'으로만 반응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나도 그러지 못해 자주 취한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박수가 정확히 어느 지점을 향하는지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결국 한국 콘텐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니까.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지 않으면서, 박수 친다고 마냥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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