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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11. 2024

두 세계의 경계 탐구하는 '박찬욱', 그리고 <동조자>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동조자> 예고편 캡처.


최근 박찬욱 감독이 HBO와 손잡고 연출한 드라마 시리즈가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되었다. 바로 <동조자>다. 박찬욱과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마크 먼든이 연출했고, 박찬욱과 돈 맥켈러가 각본을 맡았다. '호아 쉬안데' 외에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산드라 오' 등이 출연한다. 총 7부작인 이 시리즈에서 1~3화는 박찬욱이 연출했다. 첫 장면에서부터 박찬욱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동조자> 주인공은 스파이다. 그는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어느 한 세계에 전속되지 못하고,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늘 서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부모로 둔 혼혈. 남베트남에 잠입한 북베트남 스파이. 양쪽 모두를 친구이자 적으로 둔 사내. 이런 속성을 '경계인'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찬욱이 경계인에 관심을 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박찬욱의 작품에 경계인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삶과 죽음, 인간과 야생, 성년과 미성년, 이성과 광기 등 여러 경계를 하나둘 넘나들며 탐색전을 벌인다. 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최근 박찬욱의 작품은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면에 집중해서, 전작들을 떠올려보자.


영화 <박쥐> 스틸컷.


<박쥐>(2009)에는 두 명의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위치에서 이들은 전율한다. 한 명은 만족감에, 한 명은 좌절감에. 영화는 사람(이성)과 짐승(본능)의 사이에 뱀파이어를 위치시키고, 그 간극을 활짝 펼쳐 탐색을 이어간다. 그 탐색의 과정에서 둘은 피 터지게 싸우고 치열하게 사랑한다. 박찬욱의 영화에 등장하는 '경계 지역'은 주인공이 서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독특한 장소다.


<스토커>(2013)는 주인공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18살이 되는 시점에 시작된다. 처음 본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찾아온다. 가족도, 외부인도 아닌 이 남자는 인디아가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순간 등장한 것이다. 박찬욱은 두 가지의 경계를 겹쳐놓으며, 그 한가운데 선 인디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살핀다.


<아가씨>(2016)에서 자주 간과되는 것은 이 영화가 일본인이 되고 싶어 하는 한국인 이모부(조진웅)의 저택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점이다. 한국인과 다르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완전한 일본인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모부의 히스테리가 저택의 공기에 은밀하게 스며있다. 한편 <아가씨>는 완연한 신분 격차가 있는 아가씨(김민희)와 숙희(김태리)가 둘 사이 경계를 뛰어넘어 사랑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은 가히 경계의 영화라고 할 만하다. 서래(탕웨이)는 경계인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중국인이며, 번역체에 가까운 독특한 언어를 구사한다. 형사 해준(박해일)은 서래를 사랑하는 남자와, 직업인으로서 형사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이 영화에서 박찬욱은 '경계'를 애절하고도 낭만적으로 사유한다. 그것은 두 인물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자, 서로의 실체를 아름답게 가리는 장막이다. 이들은 장막에 비친 서로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경계는 사랑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경계인은 그 미지의 땅에 자신을 내던지는 탐험가다. 


<동조자>에 이르러 경계에 대한 박찬욱의 주제의식은 보다 뚜렷해진다. 1970년대 활동한 스파이 대위(호아 수안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신분뿐 아니라 인생 전체가 양면적이다. 친구 중 하나는 공산주의자, 하나는 반공주의자다. 여자친구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그는 양면성 덕에 살아가지만, 그 때문에 죽음의 근처를 벗어나지 못한다. 양면성 덕에 발탁되지만, 동시에 모욕당한다. <동조자>에서 박찬욱은 세계의 경계에 스파이를 세워둔 채로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동조자> 예고편 캡처. 둘로 갈라진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


박찬욱을 떠올릴 때 대부분 '미장센'을 언급한다. 그는 비주얼리스트로 추켜세워지는 동시에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박찬욱은 부지런히 주제의식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독이다. '복수 3부작'으로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경계'에 관한 시선은 <박쥐>, <스토커>를 시작으로 꽃 피더니,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 낭만적으로 흐드러지다가, <동조자>에 이르러 더 깊어지고 짙어진다. 나는 여기에서 박찬욱의 역량을 다시 확인한다. 박찬욱이 두 세계 사이의 간극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어둡고 좁은 심연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반짝이는 것을 거두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리라는 점을 믿는다. 경계에 대한 박찬욱의 탐구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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