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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06. 2024

<보통의 가족>에 찍힌 허진호의 인장

두 작품 사이에 부는 선선한 바람

※ 'PD저널'에 <보통의 가족>에 관한 글을 기고했습니다. 준작이라고(혹은 그보다 못하다고) 평가받는 이 작품에는 사실 놀라운 부분이 숨어 있어요. 이 지점은 영화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서 볼 때 비로소 알아볼 수 있습니다. 2000년대 한국 멜로 드라마의 대표주자였던 허진호, 그가 무려 20여 년 전 만들었던 작품과 <보통의 가족> 사이에 흐르는 은밀하고 강력한 공통점.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어요.


<보통의 가족> 스틸컷

최근 극장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선전하고 있는 <보통의 가족>은 '더 디너'라는 이름의 원작 소설에 기반했다.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헤르만 코흐의 작품이다. 소설은 전 세계에서 4번이나 영화화됐다. 그중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더 디너>는 2015년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다. 그러니까 <보통의 가족>은 준수한 작품이지만 그 설정이나 각본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보통의 가족>은 (다른 작품에 비해) 선악 구도가 강조되었고, 부모의 끔찍한 자식 사랑, 동서지간의 미묘함 등 한국적 정서도 가미되었다. 전체적으로 도파민을 자극하는 요소가 가득 충전된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보통의 가족>이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영화는 특별하게 다루어질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 지점은 영화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과 연관 지어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등으로 2000년 전후 한국적 멜로 드라마의 대표 주자로 손꼽혔던 허진호 말이다. 그러니 <보통의 가족>과 어느 옛 영화 사이를 가로지르는 허진호의 손길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아래부터 <보통의 가족>과 <봄날은 간다>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보통의 가족> 스틸컷

<보통의 가족>에는 강렬한 장면이 하나 있다. 딸에 대한 재완(설경구)의 믿음에 금이 가는 장면. 재완의 딸 혜윤(홍예지)과 조카 시호(김정철)는 우발적으로 길가의 노숙자를 폭행하고, 그는 투병 끝에 사망한다. 재완이 이 소식을 전하자 딸 혜윤(홍예지)은 "그럼 된 거 아니야?"라고 반문한다. 노숙자가 살아나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술할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됐다'는 의미다. 딸을 향한 애정의 기반을 뒤흔드는 이 발언을 듣고 재완은 몸이 굳어 멍하니 서 있다. 재완 역시 돈 되는 사건은 물불 안 가리고 받는 냉철한 변호사이지만, 인간성을 의심하게 하는 말 앞에서 그는 얼어붙는다.


이때 영화의 연출이 인상적이다. 재완은 괴로운 마음에 노숙자의 장례식장을 찾은 뒤 병원 밖으로 나온다. 길가에는 화환을 옮기는 이들이 보인다. 그 풍경 한가운데 재완이 있다. 딸과의 전화 후 그대로 굳은 재완의 주변으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마치 장례식장의 입구와, 화환과, 재완 사이를 감싼 채로 꿈틀대며 지나가는 거대한 이무기처럼 느껴진다. '스산하다'는 말을 그대로 체화한 바람. 단순히 공기의 흐름에 불과한 이것은, 그전과 후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러고 보면 허진호는 바람을 잘 쓰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또 한 번 인상 깊은 바람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것은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우연히 은수(이영애)를 만나 한 계절의 열병 같은 사랑을 한 상우(유지태).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은수에게 안녕을 고한다. 다음 장면에서 상우는 일렁이는 황금 들판을 걷고 있다. 그는 들판 한가운데서 수집한 사운드를 듣는다(상우는 사운드 엔지니어다). 가만히 소리를 듣던 그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봄날은 간다> 스틸컷

이 장면은 <봄날은 간다>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랑했던 이를 마음속으로 떠나보내는 남자의 내면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낸 장면. 이 순간이 이다지도 와닿는 것은, 들판과 상우를 온통 감싸 안은 채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의 덕분이다.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는 들판의 풀, 적당한 속도로 흔들리는 상우의 머리칼, 공기의 흐름을 감각하는 상우의 가는 눈.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알 수 없는 감각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절을 고이 떠나보내는 누군가의 마음에 접속한다. 바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장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봄날은 간다>에서 불었던 바람이 돌아왔다고. 이전과 다른 얼굴로. <봄날은 간다>와 <보통의 가족> 두 영화 모두에서 수상한 바람이 불어와 한 남자를 감싼다. 하지만 그것들은 향하는 곳은 다르다. 전자가 넉넉하고 다감하게 남자를 감싸 안고 위로했다면, 후자는 남자를 휘감고 그의 내면을 뒤집어 놓는다. 하나의 바람이 남자를 따듯한 곳으로 이끈다면, 다른 바람은 어느 싸늘한 바닥으로 내팽개친다. 어쩌면 허진호의 영화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것은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가족> 스틸컷

'재완의 통화 장면' 뒤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보통의 가족>의 백미다. 노숙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재규(재완의 동생, 장동건)는 마치 홀가분하다는 듯 밥을 퍼먹는다. 재규의 처 연경(김희애)은 시어머니의 배설물이 묻은 옷을 벗겨내며 "시원하다"고 내뱉는다. 이 장면은 그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폭행당한 노숙자의 죽음을 '시원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규는 병원에서 죽을 뻔한 환자를 살려낸다('비록 아들 때문에 노숙자 한 명이 죽었지만, 내가 많은 환자를 살렸으니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노을 진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시호는 잘못을 반성하고, 그 말을 들은 재규는 감격한다. 피해자를 빼놓은 채 자기들끼리 안도하고, 반성하고, 감격하며 과거를 날려버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전. 다시 한번 두 집안에 소용돌이가 불어닥친다.


바람이 부는 장면(재완의 통화 장면)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선해 보였던 재규는 독해지고, 침착했던 연경(김희애)은 폭주한다. 재완에게 분 바람은 모든 인물에게 닿아, 그들의 외피를 벗기고 내면을 들춰낸다. 이로 인해 사건은 예측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재완의 옷자락을 스친 바람은 그의 내면과, 다른 이의 생각, 영화의 진행까지 전부 흔들어 놓은 셈이다. 물리적인 공기의 흐름이 정서와 사고, 서사까지 연이어 변화시키는 이 진행은 우아하다. <보통의 가족>의 가장 큰 성취는 두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바람과 그것이 만들어낸 다채로운 흔들림, 그리고 이 모두를 담아낸 허진호의 연출이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실은 큰 기대 없이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의외의 장면에서 나는 오래된 기억 속 다른 장면을 떠올렸고, 곧이어 두 개는 하나로 포개어졌다. 그 사이를 선선한 바람이 분다. 들판 위를 흐르던 공기가 20년 만에 돌아와 한 남자의 뺨을 스칠 수 있을까?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이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바람은 여러 행로를 지나 나의 마음에도 닿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래서 영화가 재밌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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