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이들이 <글래디에이터>가 귀환한 이유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옛 명성에 기대 흥행을 거두고, 시리즈의 명맥을 잇기 위함이라고. 물론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히 있다고 느낀다.
<글래디에이터> 1편과 2편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있다.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로마 제국. 그곳의 안에서 시작하느냐, 밖에서 시작하느냐. 1편은 안에서 시작했다. 막시무스(러셀 크로우)는 정복 전쟁으로 지쳤고 정치적 이유로 가족을 잃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로마인으로서 로마 내부에서 겪은 비극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로마의 외부로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전쟁에서 죽어 나간 다른 국가 시민들은 헛된 저항으로 희생당한 가엾은 이들일 뿐이다.
하지만 <글래디에이터 Ⅱ>는 다르다. 이 영화는 로마군에 의해 짓밟힌 곳에서 시작된다. 로마 외부인의 시선에서 영화가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로마 내부로 들어오고 점차 로마인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외부에서 내부로의 이행. 영화는 루시우스를 통해 로마의 경계를 안팎으로 오가며 이 제국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글래디에이터 Ⅱ> 스틸컷
이 과정에서 영화가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은 로마라는 나라의 민낯이다. 강인하여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도, 법에 의해 통치되는 하나의 제국의 꿈꿨던 나라. 그러나 이제는 마치 피에 중독된 듯 살인귀들처럼 지배의 야욕밖에 남지 않은 나라. 로마의 이런 속성은 주로 황제들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영화에서 게타 황제(조셉 퀸)는 본성이 잔인해서 명분 없는 살육을 즐기고, 카라칼라 황제(프레드 헤킨저)는 머리까지 매독균이 퍼져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이토록 한심한 황제들의 실상은 로마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런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아니, 직접적인 비유라고 해야 하나. 지금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화려한 나라. 하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빈민이 들끓고, 사람을 사고파는 잔인한 룰이 통용되는 곳. 그러니까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 시리즈로 귀환한 듯 보이지만, 실은 지금 우리에게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리들리 스콧이 생각하는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무엇이 미국을 좀먹게 만들었나. 그것은 '노예의 정신'이다. 이것은 영화에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라는 인물로 형상화된다(좀 다른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각종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휩쓸어도 부족하다).
영화에서 마크리누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노예는 새로운 노예를 취하려고 한다"라고. 정신이 자유로운 이는 기회가 주어지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노예의 정신이 뼛속 깊이 박혀버린 이는, 기회가 생기면 새로운 노예를 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배-피지배' 구조에서 벗어나는 대신 자신이 이 구조의 상부에 올라서려 한다. 주인의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자는 여전히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다. '지배-피지배' 구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노예였던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크리누스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노예 상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이 인물이다. 그는 노예 상인으로서 폭력적 지배 구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 사슬의 끝은 어디인가? 바로, 황제를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피지배'의 구조로밖에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는, 가장 높은 신분의 인간을 지배함으로써 일생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제를 짓밟는 것. 단순하고 폭력적인 목표 앞에 윤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영리하고 실력이 좋은 그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 노예 신분에 좌절하며 그것을 양산한 로마 제국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는 잔인한 포식자와 같은 로마의 속성을 일찍이 알아봤으며, 이를 혐오하여 대제국을 망가뜨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증오하며 닮는 것이 세상의 한 진리인가. 마크리누스는 그토록 혐오하던 로마의 속성을 온몸으로 체화한 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저 자신을 폭탄 삼아 복수를 감행할 작정이다.
그렇다면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리들리 스콧이 생각하는 지금 미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어떤 질병이 미국을 병들게 하고 있나?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천박한 정신이다. 그것은 곧 '노예의 정신'이고, 기어이 미국 내부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라고 리들리 스콧은 말한다.
<글래디에이터 Ⅱ> 스틸컷
바로 이 지점에서 루시우스가 온다. 아버지로부터 '힘과 명예(리들리 스콧이 생각하는 고결한 정신)'를 물려받은 그는 온갖 재주로 위협을 물리치고 왕좌에 복귀한다. 마지막에 영화는 외친다. '재건하라'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지배의 야욕을 버리고, 힘과 명예를 통해 세계를 이끄는 강인한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것.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우리는 여기서 끝마치지 말고 좀 더 생각을 해보자. <글래디에이터 Ⅱ>의 교훈은 올바르다. 너무 맞는 말이라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힘과 명예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정복 전쟁, 혹은 지배의 야욕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인가? 추상적인 교훈은 현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세운 가치가 무엇인지 영화를 통해 구체화하여야 하는 시점에, 리들리 스콧은 슬그머니 <글래디에이터>의 서사 뒤로 숨는다. 로마는 '지배-피지배'의 수직 구조에 젖어있는데, 이것을 해결할 이는 루시우스라는 황태자다...? 황태자면 수직 구조의 최고봉에 있는 인물 아닌가? 게다가 그의 신분은 설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혼란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카드로 활용된다.
루시우스는 로마군의 피해를 몸소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같은 전쟁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의 전쟁 위에 세워진 로마 제국의 업보는 여전하다. 리들리 스콧은 로마의 잔인한 지배 전쟁 자체가 문제라며 심각하게 판을 깔다가, 갑자기 "앞으로는 안 할게요" 정도의 태도로 슬그머니 물러간다. 로마군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누미디아 인의 정체성을 간직했던 루시우스는, 어느새 과거는 까맣게 잃은 채 평범한, 아니 고귀한 로마인으로 복귀한다. 그는 설마 가족을 잃은 것이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 장군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인가?
의미 있는 얘기를 할 줄 알았던 <글래디에이터 Ⅱ>는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힘과 명예'도, '재건하라'는 구호도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관객이 이 영화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1편이 전쟁을 후경에 둔 채로 개인의 복수 서사를 따라간다면, 2편은 개인의 복수를 후경에 둔 채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경화 한다. 하지만 어느새 이 모두가 흐지부지되고, 영화는 그저 다음을 기약한 채 평범하게 마무리된다.
리들리 스콧 옹이 2편에서 꺼내든 주제는 분명 의미가 있다. 다만 용두사미 되며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서사와 캐릭터가 강렬했던 1편이 낫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다른 시리즈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베테랑 2>의 경우에도 1편은 서사와 캐릭터가 인상 깊었는데, 2편은 그것을 줄이는 대신 다른 의미를 찾았다. 악마 같은 범죄자와 형사 사이 한 판 승부를 담았던 <베테랑>은 2편에 이르러 오늘날 범죄의 속성의 의미를 탐구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류승완이 자신만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관련글 아래에). 하지만 1편의 쾌감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이것은 실망으로 다가올 위험이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을 유심히 보고 그것을 영화에 반영하며, 과거의 자신을 갱신하려는 감독을 응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리들리 스콧은 90살, 100살이 되어서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