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의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제77회 칸영화제 각본상 등 각종 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또한 전신 성형 이미지로 유명했던 '데미 무어'를 전면에 앞세우며 젊은 육신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그 외설성이나 잔혹함의 수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여러모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자극에 휘말려, 정작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괜한 우려를 핑계 삼아 화려한 <서브스턴스>가 전하는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아래부터 영화의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서브스턴스>는 몸에 대한 영화다. 한때 아카데미상을 받은 스타였지만, 더 이상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에서 쫓겨난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독히도 갈망하다가, 신기술로 자신을 닮은 수(마거릿 퀄리)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수는 점차 엘리자베스를 착취하며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즐긴다.
<서브스턴스>는 몸을 함부로, 아니 아무렇게나 다룬다. 수가 탄생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살이 찢기고 골수가 빠져나가는 과정은 꽤나 징그러운데, 영화는 그걸 가감 없이 클로즈업하고 빤히 관찰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몸을 한낱 유기체 덩어리쯤으로 취급한다. 우리의 소중한 육신은 <서브스턴스> 안에서 조작할 수 있고 생성·폐기할 수 있는 재료일 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substance(물질을 의미하는 영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인간의 몸, 그 자체다.
엘리자베스의 척추에서 태어난 수는 그녀의 상처난 등을 성의 없이 바느질한다. 그리고 수는 기절한 엘리자베스를 넣어둘 공간을 만든다. 이때 수가 벽에 못을 박는 조심성 없는 모습은 앞서 엘리자베스의 등을 기우던 모습과 겹친다. 수에게 엘리자베스의 몸은 이 집의 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둘은 모두 그녀에게 윤택함을 제공하는 자원일 따름이다.
<서브스턴스>는 노골적이고 외설스러운 영상을 반복한다. 엘리자베스의 주름진 피부, 그리고 수의 건강미 넘치는 몸을 보여줄 때 특히 그렇다. 이것은 관객을 현혹하는 동시에, 이 영화에서 몸이 가진 의미를 제시한다. 그것은 한때 건강했다가 곧 주름지는 살덩이다. 거기에 어떤 가치나 존중은 없다. 더 돈이 되는 몸과 아닌 몸이 있을 따름이다. 그녀들의 육신은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한 채로 카메라 앞에 발가벗겨진 채 노출되고 평가받는다. 그 노골적인 장면들은 이 세계의 잔인한 룰을 폭로하며, 오늘날 우리 몸이 취급되는 방식을 고발한다.
수의 존재는 다양하게 읽힌다. 나에게서 태어났지만, 더 젊고 아름다운 존재. 내가 원했던 환상을 실현하고, 대신 나의 시간을 앗아가는 생명체. 비록 수처럼 눈앞에 현현하지 않더라도, 내가 만들었으나 차츰 "나를 먹어 치우는" 그 무언가가 바로 수다. 그것은 SNS에서만 존재하는 '온라인 속의 나'일 수도 있고, 우리가 꾸며낸 '사회적인 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세계의 잔인한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착취한 끝에 탄생시킨 그 무언가는 모두 '수'인 셈이다.
수와 관련해, 영화가 거듭 강조하는 룰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한 몸이며, 둘은 시간을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보면 둘이 '에너지'마저 나누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가 만개할수록 엘리자베스는 피폐해진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품은 '수'에 대한 풍자다. 그녀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빨아먹으면서 커질 때,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그러니까 인생을 누구에게 쓸 것인지를. 나인가, '수'인가.
<서브스턴스>는 빛나는 자리를 두고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가 대결한다는 점에서 <이브의 모든 것>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이전 영화들이 나와 타인 간의 경쟁을 그렸다면, <서브스턴스>는 나와 나 사이의 싸움에 집중한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노화를 막는 것마저 능력이 된 지금, 외면의 아름다움을 향한 전쟁은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개인이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전환된다. 아름다움을 위한 자기 파괴의 굴레. 그 끝은 무엇이냐고 <서브스턴스>는 묻는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비록 지나치게 잔인하고 외설스럽지만 <서브스턴스>의 연출은 이유가 있고, 이 영화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관철한다. 메시지와 연출이 일치하는 영화. 그런 점에서 <서브스턴스>는 가식적이거나 이중적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영화가 놓친 부분이 있다. 몸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풍자하기 위해, 이 영화는 몸을 한없이 조작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이토록 파괴적인 마지막이 혐오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인간의 기괴한 욕망 아래 뒤죽박죽 엉망이 된 몸이 등장할 때, 이 장면의 충격은 기형적 신체에 대한 혐오를 전제한다. 선이 없는 채로 날뛰는 풍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서브스턴스>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반부에서 꽤 날카로운 풍자를 선보이던 <서브스턴스>가 뒤에서 힘이 빠진 채 속절없이 빛을 잃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