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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죽는다는 것, 영화 <국보>

영화비평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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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 감독, 이상일이 연출한 <국보>의 첫인상은 화려하다. 일본에서 1200만명이 넘게 관람하며, 일본 실사 영화 중 흥행 수입 1위에 등극. 게다가 '가부키'를 전면에 내세웠고, 요시자와 료와 요코하마 류세이라는 청춘 스타들이 주연을 맡았다. 러닝타임은 무려 175분.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았다.


예상대로 화려한 <국보>는 강렬한 서사와 스펙타클을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감동은 어느 소박하고도 고요한 지점에서 발원한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국보>가 끊임없이 간절하게 응시하는 곳. 그곳에는 다름아닌 '무대'가 있다.


이 영화는 예인들에게 묻는다. 무대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또한 무대에서 죽는다는 건 어떠한 것인가요. 이것은 자기만의 스테이지를 열어젖히고자 하는 그 모든 이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공연이 펼쳐지는 작고도 거대한 공간 위에서 미지의 장막을 열어젖히며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영화, <국보>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아래부터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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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으로서 키쿠오(아역: 쿠로카와 소야)의 인생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곤고로(나가세 마사토시)를 잃고,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손에서 크면서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니까. 그의 운명을 예고하는 장면이 있다. 곤고로는 야쿠자끼리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때 곤고로가 숨어있는 아들을 향해 똑똑히 지켜보라고 읊조리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키쿠오는 닫힌 창문 너머로 아버지를 보기 때문에, 그의 싸움과 죽음은 마치 비극적인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곤고로는 슬픈 극의 주인공, 그걸 지켜보는 키쿠오는 관객. 그렇다면 곤고로가 쓰러진 한 줌의 땅은 무대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아버지의 마지막(죽음)과 아들의 시작(가부키 배우로 성장)이 교차하는 이 순간은 저 특별한 무대 위에서 상연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본 최고의 온나가타, '하나이 토이치로(키쿠오의 예명)'의 등장을 예고하는 순간이다.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내게 없는 단 한 가지를 너는 가졌으니까. 너는 친애하는 적이자, 나를 이해할 단 한 사람. 텅 빈 극장에서 슌스케가 키쿠오에게 속삭인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있는 것만 같아. 그의 은밀한 말은 무대의 본질을 관통한다. 보는 이가 없다면 춤을 추는 그곳은 그저 바닥일 뿐이다. 무대 위와 아래를 가르는 하나는 바로 시선이 아닐까. 자기만의 무대를 간절히 염원하는 슌스케는 관객이 없는 순간마저 시선을 느끼며 자신이 무대 위에 숨쉬고 있음을 감각한다.


하지만 먼저 기회를 잡는 쪽은 키쿠오다. 그는 슌스케를 제치고, 한지로가 연기해 온 '오하츠' 역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으며 '하나이'의 이름을 물려받는다. 그가 자신의 예명 '하나이 토이치로'를 세상에 천명할 때, 한지로는 피를 쏟으며 자리에서 쓰러진다. 무대를 건네어 준 인간의 처참한 무너짐. 슌스케를 향해 "너의 피를 갖고 싶다"라고 하던 키쿠오의 고백은 잔인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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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슌스케가 복귀하며, 키쿠오는 무대를 빼앗긴다. 훔친 피는 진짜 핏줄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고, 이때부터 키쿠오의 고난이 시작된다. 그의 소원을 들어준 악마는 이제 대가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이 있다. 키쿠오는 볼품없는 무대를 전전한다. 얼마 없는 관객 속에서, 유독 키쿠오를 욕망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가 있다. 키쿠오가 뒤로 돌아 춤을 추다가 다시 앞쪽으로 돌았을 때, 그 남자는 어느새 무대 위에 올라와 있다. 어떠한 극적인 효과도 없이, 그저 무대 위에 우두커니 올라 선 이 남자의 존재는 실로 공포스럽다. 그의 위치로 인하여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무너지며, 키쿠오는 조촐한 무대 마저 빼앗겨 버린다. 다음 순간 남자는 바로 쫓겨나지만, 예고 없는 침범의 잔상은 오래 남는다. 이것은 무대의 완전한 소멸. 예인에게 이보다 큰 형벌이 있을까? 이 순간 키쿠오는 예인으로서 바닥을 경험하고, 새롭게 태어나 진정한 무대로 복귀한다.


슌스케가 마지막 무대에서 오하츠를 연기한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가부키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게 만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그 역할. 마침내 슌스케는 '소네자키 신주' 무대에서 온 몸을 던져 오하츠를 연기하며 아니, 오하츠와 하나가 되며 최고의 공연을 선보인다. 극의 내용처럼 그는 오하츠와 함께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공연 뒤에 영화가 슌스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다. 예인으로서 슌스케는 이 공연에서 산화했으니까. 무대 위를 그토록 염원하던 한 남자는 무대와 하나가 된 채 아름다운 빛으로 흩어진다. 그러므로 무대 위에서 죽는 것은 무대 위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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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화의 마지막을 이야기해야겠다. 마침내 국보의 자리에 오른 키쿠오는 다시 없을 최고의 공연을 펼친다. 스산하고 어여쁜 푸른빛. 그 사이를 홀로 가로지르는 하나이 토이치로. 움직임 하나 하나 숨죽이게 만드는 공연. 그 끝에 열광적인 박수가 쏟아지는 듯 하였으나, 어느새 키쿠오는 무대 위에 홀로 있다. 가장 뜨거운 순간에 키쿠오는 다른 세계로 홀연히 건너온 것이다. 하지만 이 당혹스러운 고독은 어쩐지 친근하고 포근하다. 그곳에서 키쿠오는 늘 그리던 광경과 만난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저 찬란한 빛. 아름답다. 키쿠오와 슌스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토록 닿고 싶어 했던 순간 안에 머물며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린다.


키쿠오 홀로 남겨진 이 공간은 낯설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절정의 순간에 마주치는 그 세계의 형태는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광경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이 무대 위에서 죽기를, 그래서 영원히 살기를 각오한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세계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 별빛 같은 찰나를 펼쳐, 그 안에 영원히 기거하고 싶은 마음은 쉬이 채워지지 않는다.


삶의 무대 위에 선 우리는 아주 가끔 허락되는 그 세계와 언젠가 마주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같은 움직임을 정성들여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터무니 없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환상. 요원한 줄 알면서도 이 기도를 멈출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국보>의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황홀한 순간이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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