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보령의사수필문학상 동상 수상작]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하얀 불빛의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불빛은 밝으나 빛이 들어차있는 이곳의 공기는 축축하고 차갑다. 각종 약품과 소독약 냄새에 환자의 침구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까지 더해져 흔히들 ‘병원냄새’라고 부르는 냄새가 난다. 희미한 불안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의 시침은 3시를 가리키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초침은 나를 재촉하는 것 같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멍하게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집중이 힘들다. 졸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처치실’이라고 부르는 공간에 앉아있다. 온통 하얀 벽에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심정지 환자를 대비한 제세동기, 응급약물과 각종 기구가 들어있는 4단짜리 카트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간. 이곳은 방이라기보다는 간호사실 옆에 딸린 텅 빈 구석에 불과하다. 새벽이라 복도와 병실은 온통 어둡지만 처치실만큼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불의 밝기를 올려놓은 것처럼 밝다. 하얀 눈밭에 비추는 햇빛을 맨 눈으로 볼 때처럼 하얀 벽에 비추는 형광등 불빛이 눈을 살짝 찌푸리게 만든다. 이곳에 누울 환자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경고라도 하려는 것일까.
‘처치’라는 것이 가벼운 치료의 느낌이지만 실제 처치실에서 시행하게 되는 그 ‘처치’라는 것은 생명을 급박하게 붙들어 매어 놓고 버티는 일인 경우가 많다. 인공호흡기를 위한 기관삽관, 대량수혈을 위한 중심정맥삽관, 최악의 경우 심장이 멈춘 환자에게 시행하는 심폐소생술 등. 이곳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 처치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질병은 취침 시간, 식사 시간 등을 배려하여 공격을 멈춰주는 관대한 상대가 아니므로 병동에는 24시간 의료진이 있다. 오늘 새벽도 취침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질병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한 사람을 처치실에 눕혔고 어두운 병동 중 처치실에만 밝은 형광등이 켜졌다. 그리고 잠에서 깬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
모든 것이 어렵던 내과 전공의 1년 차, 3월이었다. 1년 차이고 3월이니까 사실은 전공의를 이제 막 시작한 초보 내과의사라는 말이다. 그날은 몇 주간 제대로 된 취침을 하지 못하고 각종 응급 상황에 시달리던 어느 평일 새벽 3시였다. 처치실에 누워있는 환자는 50대 남자였다. 누워있다기보다는 반쯤 일어나서 앉아있었는데 그가 호흡하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그를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식은땀으로 머리가 젖어있고 연신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를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호흡근’을 사용하는 힘겨운 호흡을 하고 있었다. 정상 호흡 때는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호흡근을 호흡부전 시에는 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전형적인 모습은 환자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쇄골 위아래가 움푹 들어가며 가슴을 들썩이는 모습이다. 정확히 그가 그런 모습으로 주변 공기를 모두 빨아들일 것 같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폐에는 분명 그의 몸에서부터 자라났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폐암. 사람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흡사 제동장치가 고장 난 탱크 같은 무지막지한 암이 차근차근 그의 생명을 정복 중이었다. 흉부 사진에서 험악한 모양의 폐렴이 뚜렷하게 보였고 동맥혈 채혈 결과는 그의 몸에 산소가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내는 생기 없는 알람소리와 환자를 오히려 질식시킬 것만 같은 고압의 산소 소리만이 적막한 병실 복도에서 규칙적으로 불안감을 일깨웠다. 경험이 부족한 내가 봐도 그에게 곧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상황이 올 것이었고 인공호흡기를 연결하려면 기도에 관을 넣는 기관삽관이라는 처치를 해야 했다. 완치가 불가능한 질환을 가진 환자, 특히 말기 암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적용하기 전에는 반드시 한 번은 환자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적극적인 치료를 원하는지, 치료 중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존엄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인공호흡기를 중단했을 때 안 좋은 결과가 예상되면 기관삽관을 의료진의 임의대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삽관 전에 충분한 안내와 상의가 필요한 것이다. 확실하게 인공호흡기가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야만 관을 제거할 수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거나 혹은 그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거나.
그는 병원에 함께 있어줄 가족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소리 내어 입 밖으로 꺼내기도 무서운 암이라는 무거운 질병. 그동안 혼자 그것을 짊어졌을 그의 외로움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암보다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생은 어떠했기에 늦은 새벽,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생면부지 어린 의사 밖에 없는 것일까. 대개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는 보호자를 통해 전하는 것이 환자에게 덜 충격적일 수 있다. 그래서 보호자에게 먼저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앞으로의 치료에 대한 의사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환자와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지, 없다면 서두르시는 게 좋겠다고.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건 핑계일 뿐이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어려움을 그들에게 넘기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당신의 가족은 곧 죽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그러나 그는 보호자가 없으니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 그와 직접 이야기를 해야 했다.
"환자분 많이 힘드신가요? 그래도 이 동의서 한 번 봐주셔야 해요. 폐렴이 심하고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셔서 인공호흡기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인공호흡기는 한 번 시작하면 좋아지기 전까지 중단을 못해요. 폐렴이 확실히 나을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공호흡기를 안 하면 돌아가실 가능성이 많습니다. 상의하실 보호자는 정말 안 계신가요?"
"..."
그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렸을 설명을 하면서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알아챘을까.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처치실 공기를 더욱 차갑게 했다. 숨이 차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본인도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을 직감하고 있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어쩌면 삶과 죽음이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동의서와 펜을 들고 있는 손이 초라했다. 그의 두려움을 이토록 억지로 무시하면서 이까짓 종이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바늘 수백 개가 전신을 찌르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끈거리는 이 느낌을 떨쳐버리고 싶어 도망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소리로 아무것도 확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했고 위로 한 마디 건네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직결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고작 이 정도의 설명을 하고 선택을 하라니, 그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린 꼴이었다. 의사로서는 가장 미숙한 시절의 나에게, 가장 확신 없는 목소리로 들었을 그의 생이 길게 남지 않았다는 소식. 그는 내 목소리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나 역시도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의사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밤이었다. 오히려 지식이 있기에 더 잔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좌절감이 덮쳐왔다.
환자는 끝까지 확답을 주지 못했다. 잘 모르겠다고, 그저 숨이 차다고만 말했다. 상태가 약간 좋아지는 듯하여 추가 처치는 없었으나 처치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1년 차의 버거움을 덜어주기 위해 다음날에는 3년 차 선배가 처치실 환자를 대신 봐주었다. 그날 오후쯤 환자가 다시 안 좋아져서 중환자실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환자실에 내려갔다는 것은 결국 그가 기관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 치료를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 중환자실 담당 전공의로 주치의가 바뀌면서 환자는 내 손을 떠났지만 세세한 내용까지 글에 담아낼 수 있는 걸 보니 지금까지도 나는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모양이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을 배웠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죽음에 대해 설명할 책임이 생겼던 그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사투하던 그때 그 청년은 이제 누군가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다. 죽음이 내 책임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아무리 말기 암환자라도 치료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라도 환자와 감정적인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때 그분을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와 독대하여 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폐렴이 심해서 인공호흡기가 필요해요. 지금 숨차서 힘드신 것 좋아지려면 꼭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암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 고비는 잘 넘기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선택을 그에게 넘기지 않고 내가 가진 지식으로 방향을 정해주는 것, 살짝 미소를 띠는 것,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힘주어 말하는 것. 이것이면 충분했을지 모른다. 확신의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덜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최선을 다한 뒤에는 결과에 상관없이 나도 그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집으로든,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든, 후회 없이.
더 이상 죽음을 설명하면서 두렵지 않다는 것, 환자를 마음속에서 훌훌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슬픈 일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확신 없는 말로 되려 환자에게 상처와 두려움을 주는 의사가 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냉정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음을 배우고 있다. 어쩌면 냉정하기 때문에 더욱 따뜻한 것일지도 모른다. 새벽 3시, 처치실 간이침대에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외로운 청년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은 오늘이다. 병동의 많은 환자들을 밤새 지켜야 하는 상황보다 혼자 외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어떤 이의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어쩌면 더 두려웠던 그때의 내 어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