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정리
벼르고 벼르던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유리병만 수십 개고 음식물쓰레기가 20리터나 됐다. 그나마도 정리가 끝난 게 아니다 다음 주에는 냉동고 정리를 해야 한다. 세 가족이 한집에 살면서 각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부엌은 엄마의 공간이었다.
물론 개수대에 그릇이 가득하면 설거지도 하고 배고프면 음식도 만들어 먹지만 냉장고나 그릇 넣는 찬장은 아무리 지저분해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가스레인지 청소나 주방후드 청소는 가끔 했지만 냉장고나 찬장은 내겐 금기의 영역이었다.
몇 년 전 설거지 한 그릇이 넘쳐나서 찬장에 있는 오래된 컵과 그릇들을 현관 앞에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엄마 눈치를 보고 엄마는 왜 엄마살림을 말도 없이 버리냐고 서운해하셨다. 그 뒤로 찬장에 있는 그릇은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되고 금이 갔을지라도 그릇은 엄마의 역사였다.
최근 부모님의 먹거리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엄마는 내가 배송주문하는 음식의 대부분을 냉동고에 보관한다. 오리훈제, 간장닭갈비, 갈비탕, 설렁탕 등을...
일주일에 약 5만 원에서 10만 원가량의 반조리식품을 주문하는데,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러려면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고 바로 드셔야 하는데, 대부분의 음식을 냉동고에 보관하니 식사 한번 하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얼어 있은 음식을 해동해야 했다.
엄마는 냉동보관 된 음식이라도 금방 녹는다고 하지만 노노노
반조리 식품은 쉽게 편하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므로 빨리 드셨으면 하는 게 나의 계획이었으나 부모님은 나의 생각과 늘 달랐다.
그래서 난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꺼내 사진을 찍어 언니들에게 보냈다. 그냥 놀랄 줄 알았던 언니들은 그냥 주부의 반응을 보였다.
되짚어 보니 언니들의 냉장고도 엄마 냉장고 못지않았다. 살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제인가 보다.
부모님 안 계신 주말에 잠깐 한다는 게 4시간이나 걸렸고, 그것도 정리가 끝난 게 아니었다. 급하게 마무리하고 저녁 약속이 있어 외출하면서 엄마가 냉장고 정리된 걸 확인하고 음식은 왜 버렸는지 전화로 따져 물을까 걱정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저 유리병을 버리지 말라고 나중에 토마토 퓌레를 담을 거라는 말만...
사실은 버린 음식물의 대부분이 간장으로 담근 장아찌였다. 깻잎이 3병, 우엉이 4명, 오이가 3병, 기타 여러 가지 장아찌가 수십 개... 그래서 앞으로 엄마가 만들겠다는 토마토퓌레가 얼마나 될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그럼 난 또 토마토를 몇 박스나 사다 날라야 하는지 걱정이 될 뿐...
생각해 보니 엄마의 장아찌는 다 사연이 있었다. 내가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사다 놓고 미쳐 다 챙겨 먹지 못했던 파프리카, 우엉, 오이가 썩어가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고, 살림은 싫지만 소꿉놀이하듯이 간장 붓고 채소를 써는 자잘한 작업들이 엄마의 취미였으리라
그렇다고 그걸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 줄 생각은 없지만, 수많은 장아찌를 나 혼자 먹기는 힘드니 냉장고에 차곡히 넣어 두었다가 가끔 생각날 때 꺼내 먹는다는 것이 어느새 몇 년이 지났을 뿐,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깝고 간장에 절인 짱아지니 썩진 않으니 뭐 대략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번 냉장고 정리를 하면서 느낀 건 살림은 날을 잡아서 하는게 아니라 꾸준히 매일매일 정리하고 정돈하는 게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또 다른 일상에 치이다가 정작 내 생활공간의 정리정돈을 잊어 일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일 뿐
그렇다고 앞으로 주방 정리를 꾸준히 하겠다는 다짐은 차마 못하겠다.
그저 냉장도 정리하듯이 날을 잡아서 꾸준히 고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일상이 되겠지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