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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Jun 30. 2024

세대전쟁 in 스웨덴

15-2. '살아있는 성' - 칼마르(Kalmar)



"외란드에서 다리 하나 건너니까 칼마르네."

"그 다리가 6km라서 그렇지만..."

칼마르 시 상공에서 본 외란드 대교(좌상)와 칼마르성(우하)


칼마르의 상징인 칼마르성은 12세기 축조되었지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16세기 바사 대왕 이후다. 이 성은 일본의 히메지성, 포르투갈의 페나성 등과 함께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21개의 성에 포함되었고, 스웨덴의 성 중에서는 유일할 만큼 빼어난 외관을 자랑한다. 당시 CNN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르네상스 양식의 성'으로 소개했다.


"그럼, 칼마르성의 역사를 좀 알아볼까?"


"12세기 한자동맹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독일 등 유럽 본토에 비해, 스웨덴이나 덴마크는 왕국으로서 물자나 병력이 모자라 지역을 통치하기에는 미약한 세력이었어. 당시 발틱해의 해적들은 상인들을 위협하는 것을 넘어, 해안가를 통해 침범해 농장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기도 했지. 

옛 지도에 표시된 스웨덴의 모습(출처: 칼마르성 박물관)


시간이 지나면서 한자동맹을 바탕으로 독일 북부와의 교역이 확대되자, 이들과 근거리에 있는 칼마르 지역은 독일, 고틀란드섬 등과 무역의 요충지가 되었어. 사람들은 무역의 확대에 따라 창궐하는 해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지. 


그래서 1180년대 칼마르 해안가를 중심으로 방어 목적의 망루를 설치하고 그 배후로 칼마르 시가 형성되기 시작해. 무역의 중심지가 해적 방어의 요충지를 겸하게 된 거지. 1250~1290년 사이(추정) 북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가 이 지역에 축조되었어.


칼마르 성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지역의 이름이 스웨덴 고대어인 'kalm'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는 '돌무더기(a collection of stones)'를 의미했다고 해. 당시 독일 등 유럽 본토와 교역하던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스웨덴으로 돌아올 때, 마치 등대처럼 칼마르 지역의 돌무더기를 보고 항해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 

과거 칼마르 성과 배후 마을의 모습(출처: 칼마르성 박물관)


'통나무 더미로 쌓아 올린 섬'이란 뜻의 스톡홀름은 1250년대에서야 나타나지만, 칼마르는 이미 12세기 중엽에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있었지. 13세기에서 16세기 걸쳐 이 지역의 인구는 2~3천 명으로 추정되어 스웨덴 내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하네.


2013년 칼마르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 작업에서는 12세기 중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밀집 지역에서 돼지 뼈가 많이 발견됐는데, 이후 축조된 건물로 갈수록 양이나 염소의 뼈가 많이 나오기도 했어. 


학자들은 이것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진행됐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구먼. 일단 집안 우리에서 키우는 돼지에 비해, 양이나 염소는 방목 등의 기술과 지역도 추가로 필요할 만큼 기술도 발전했다는 것이고 돼지고기 말고 다른 육류가 필요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


칼마르 지역은 독일의 한자 동맹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융성해지면서, 한자 동맹 지역의 도시 모형을 본떠 지역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해. "  

중세 칼마르 앞바다 풍경

    

"아... 그래서 칼마르는 이미 13세기 이 지역의 중심지였었구나... 그래서 당시 이제 막 생겨난 스톡홀름과 비교도 안될 정도였고, 그래서 칼마르 동맹도 체결된 거고... 그나저나 이 동맹의 중심에는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 덴마크의 여왕이라고 하던데..."


"맞아. 마르가레타(Margareta) 여왕이라는 사람인데, 그녀는 1353년 덴마크의 왕인 Valdemar Atterdag의 딸로 태어났어. 고작 10살의 나이에 노르웨이 왕과 결혼하고 17세에 아들인 Olof 왕자를 낳았지. Olof가 5살이 되던 해 그의 할아버지가 죽고 이후 다시 5년 후에 아버지까지 죽게 돼. Olof는 이미 5살 때 왕위를 계승했지만 너무 어려서 실제로는 마르가레타가 당시 관례에 따라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모두 통치했는데, 이 Olof왕마저 17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서거하게 되지."


"시아버지, 남편, 아들까지... 참... 마르가레타에 대한 평가가 당시 안 좋았겠는데?"

칼마르 성 내 전시된 마르가레타 여왕의 조각상, 멀리 그녀가 썼던 왕관도 보인다.

    

"오, 그렇지 않아. 그녀는 매우 영리하고 수완이 좋게 섭정을 했다고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저명한 인사들을 끌어모으는 능력도 있었다고 해. 그래서 아들이 죽은 이후에 공식적으로 통치권이 없었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스웨덴에서도 인정을 받았을 정도였다는 군. 


당시 스웨덴은 Albrekt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상당수 귀족들이 그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마르가레타에게 이 왕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이르지. 결국 마르가레타는 1389년 Albrekt왕의 군대를 Falköping 전투에서 격파하고 스웨덴까지 지배하게 돼.   


마르가레타는 이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모두 통치하고자 1396년 16세의 자신의 어린 조카인 에릭 아브 폼멜(Erik av Pommern)을 노르웨이 왕으로 지명하고, 덴마크와 스웨덴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만들었어. 


이후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교회와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고, 3국을 대표하는 67개 지역에서 선발된 대표들을 모아 이 지역의 안정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회의를 1397년 6월 소집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칼마르였어. 여기서 에릭 아브 폼멜은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포함)의 통합 왕으로 추대되고 133명이 기사 작위를 받게 되지. 이것이 바로 '칼마르 동맹'이야.

칼마르 동맹 법안 초안(출처 : 칼마르 성 박물관)


이 동맹은 마르가레타의 나라인 덴마크가 주도권을 잡았고 나머지 국가들은 종속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는데, 동맹 법안에 따르면 3개국의 국정은 분리했지만 통합조건을 규정한 실제 헌법은 비준되지 못한 채 초안에 머물렀었다고 해. 


마르가레타는 완전한 통합을 위해 각 나라가 독자적인 법과 관습을 유지하고 그 나라 관리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고 언급된 조항들을 반대했지만, 그 누구도 공개적인 불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후 각국 군주들도 언급을 회피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먼. 


하여간 이 동맹은 1523년 스웨덴 판 '광개토대왕+세종대왕'인 구스타프 바사 대왕이 스웨덴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깨졌지만, 126년간 유럽 최대의 영토를 가진 왕국으로 위세를 떨쳤고 칼마르 성도 이때가 화양연화 같은 시절이었지. 


이후 스웨덴의 최남방 접경도시로서 1611~1613년 칼마르 전쟁 당시 덴마크의 공격을 받아 성이 무너지는 등 17세기 중반까지 이 일대를 회복하려는 덴마크와의 주요 격전지가 되기도 했어. 

칼마르 전쟁 상황(출처 : 칼마르 성 박물관)


이후 1658년 로스킬데(Roskilde) 조약에 따라 스웨덴이 지금의 영토 모습대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 덴마크를 몰아내면서, 칼마르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기능은 상실하게 되지. 동시에 스웨덴의 중심은 스톡홀름으로 옮겨가면서 칼마르 성은 다른 스웨덴 남부 지역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들을 수용하는 감옥이나, 저장소, 양조장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어. 


특히 정치범들을 수용하거나 여성 범죄자의 재판소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며, 다양한 고문이나 처형 방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예를 들면 '물에 의한 심판(Trial by Water)'의 경우, 마법(sorcery)을 부렸다던가, 살인 또는 방화를 저지른 여성을 손을 무릎 뒤로 묶은 채로 물속으로 던졌다는군. 그래서 떠오르면 유죄이고, 가라앉으면 무죄로 판단했었대. 이래나 저래나 죽는 건 마찬가지인 거지."

'물에 의한 심판(Trial by Water)' 재현 사진(출처 : 칼마르성 박물관)


"칼마르는 그럼 역사 속의 도시일 뿐이겠네. 지금은."


"아니야, 현재도 이커머스, 디자인, 그린산업을 중심으로 6,400여 개의 기업이 활동하고 있고, 9개국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활발한 협력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인구도 계속 유입되고 있어 주택 신축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도시의 상징인 칼마르 성에는 1900년 초까지 교도소장 가족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했었는데, 지금은 보수와 증축을 거쳐 르네상스 양식을 갖춘 아름다운 성으로 변모해 시민 또는 관광객들의 휴식처는 물론 각종 전시, 공연, 레스토랑 및 카페, 크리스마스 시장, 강의, 회의 등을 위한 장소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어. 그래서 지금도 '살아있는 성(A Linving Castle)'이라고들 하지."


"아, 정말 그렇구나. 성은 오래됐지만, 계속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사와 현재가 같이 살아 있는 모습. 파괴하지 않고 원형은 유지하면서, 그 용도를 전쟁이 아닌 요즘 사람들의 문화와 업무의 장소로 문화재를 유지하고 활용하는 모습은 우리도 좀 배워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계속 '살아있는 성'이 될 테니. 오래된 성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같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도 경복궁에서 회의를? ㅎㅎ" 


칼마르 성의 가을(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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