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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Sep 18. 2023

기억 1975년, 2009년 또 2023년

대한민국 명예영사 Antonio Devesa de Sa Pereira

요즘 미니멀 라이프라고 하는데, 컴퓨터에 쌓여있는 파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난다. 정리의 기본은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주말에 틈나는 대로 컴퓨터 파일을 지우고 정리한다. 97년부터 담긴 갖가지 문서, 사진 파일들을 보고 지워나가다 보면 아 이랬었지…. 하는 기억도 있고, 어! 맞아 이 양반은 어떻게 지내시지? 하고 잠시 눈을 감는 때도 있다.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더니…. 분명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 나는 여느 때처럼 파일을 지워나가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아…. 이 분…. 키보드를 멈췄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의 근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문득, 예전에 썼던, 10여 년 전 블로그를 뒤져보았다.      


대사관에서 영사업무를 하다 보면, 한정된 인원으로 주재국 내의 모든 외교 업무나 사건·사고를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나라의 유력인사들을 명예영사로 위촉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때도 있고 일부 문제가 있는 때도 있지만 현지에 그 존재만으로 커다란 지원군이 되어준다. 말 그대로 무보수 원칙임에도 그들의 헌신과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하며, 자신을 임명해 준 국가가 최빈국일지라도 명예영사는 물적, 심적 정성을 다해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명예영사단을 꾸릴 만큼 많은 명예영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내가 포르투갈에 부임해 첫 재외공관 생활을 시작했을 때 담당 업무 중 하나가 영사였는데, 당시 명예영사는 제2의 도시 Porto에 있는 Dr.Pereira라는 분이셨다. 영사로서 명예영사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기에 나는 부임한 지 3개월이 지난 12월 초 어느 겨울 그를 방문하고자 출장 약속을 잡았다.      


떠나기 전, 직원들에게 어떤 분이냐고 물어보니 모두 나이가 1935년생인 고령이시고 약간 치매기도 있으므로 더 이상 계속 위촉하기보다, 이번에 가서 이젠 그만두시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들 했다. 첫 출장에 사표 받으러 가는 꼴이 되었다. 이런……. 하긴, 내가 부임했던 2009년만 해도 포르투갈 내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아직 많았고 보수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적당히 말씀드린 뒤 사직 의사를 확인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Porto행 기차에 올랐다.      


리스본에서 출발하며 전화를 다시 한번 드리니, Dr.Pereira는 역 앞에서 기다리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통일호 같은 열차를 타고 가며, 초면인데 가서 무슨 말로 계속 이어나가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지나 Porto에 도착했다. 



"Boa tarde!(영어로 Good afternoon!)"     


그는 나를 보자마자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하니까 이 동네 한국이나 동양사람이 별로 되지도 않고, 자신은 한국 사람들을 많이 봐와서 잘 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시간에 도착한다고 나한테 전화한 동양인이라고 범위를 좁히면 당신밖에 더 있겠어?”하면서 껄껄 웃었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외모의 그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손수 자신의 차를 가지고 나와, 나를 태우고 Porto 시내를 구경시켜 주었다.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가시나 해서 가는 곳을 물어보니 점심 전에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주겠다며 시내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건물의 2층에 올라가 문을 연 그의 사무실에는 태극기와 한국에서 가져온 듯한 장식물, 그리고 그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이 있었다. 이 먼 곳에 태극기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Pereira 명예영사님의 사무실에서(2009.12월)


"와, 영사님, 태극기 앞에서 좀 찍을게요." 

"zzik-o(찍어)."     


그의 사무실 방문은 이렇게 유쾌하게 시작됐고, 한국에 대한 인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935년 Porto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언론을 통해 한국 전쟁에 관한 기사를 보며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가문의 견실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 1974년 일어난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당시 한국인 부부를 보호해 주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75년경 Porto 항구 앞에서 한국 자동차를 선적하고 가던 화물선이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국인들이 Porto 시내 임시 거처에서 지내게 되자 관련 기사를 본 Dr.Pereira는 그들을 직접 찾아 한국으로 떠날 때까지 정성껏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주포르투갈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시점도 1975년이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1981년부터 주포르투갈대한민국대사관 명예영사로 위촉되고 수십 년간 자리를 유지하며, 포르투갈 내 폭넓은 정/관/재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교민과 여행객 보호, 우리 지상사 진출 지원 등 많은 일을 지원해 왔다는 것이었다. 노인장께서 오래된 기억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 부정확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는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nineteen seventy-five, 1975년)"를 몇 번씩 연발하면서 그때의 감성에 잠시 빠져든 뒤, 이어 나머지 내용들을 성심껏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약간의 치매 초기 셔서 그런지 그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하는 말씀은 방문 내내 반복됐다. 사무실을 나와 점심을 하러 차에 탔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식당에 도착해 차에 내려 들어가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메뉴를 시키고 기다리는데도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다 먹고 디저트 시키는데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물론 그것만 빼면 다른 대화는 모두 정상적이라 문제는 없었고,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명예영사단만 출입할 수 있다는 클럽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음 일정으로 가봐야겠다고 하자 그는 매우 섭섭해하며 시내 구경 다 시켜줄 테니 더 있다가 가라고 몇 번을 얘기했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그래서 다음에 다시 휴가를 내서라도 찾아뵙겠다고 하니, 그는 잠깐 생각하고 답했다.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첫 Porto 일정은 그의 환대로 기분 좋게, 그리고 포르투갈의 정을 느끼며 돌아왔다. 

Pereira 명예영사님과 O Porto 시내 광장에서(2009.12월)



사무실로 복귀한 뒤 그의 기록을 뒤져보니 한국에 대한 포르투갈 내 인지도가 없을 때부터 정말 많은 일을 한 분이었다. 그런 그를 노쇠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영사에서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매몰찬 것 같아, 나는 그 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후 업무를 하다가 좀 막히는 일이 있으면 리스본에 사는 그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한국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로도 가끔 그의 근황을 들었는데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신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에 인사차 전화를 드리니 자신은 아직도 건강하다며, 만약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지원할 만큼 건재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내가 웃으면서 "근데 한국이 멀어서 가실 수 있겠어요?"라고 하자, Dr.Pereira 영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 아…. “     

나는 뵌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깜빡했네…. 하고 머리를 때렸다.     


다음 해 초, 대사관에서 포르투갈 친한파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Dr.Pereira 영사는 따님과 함께 멀리 Porto에서 오셔서 참석해 주셨다. 뵌 지 한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건강이 좀 안 돼 보였다. 따님은 "장거리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 굳이 오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모시고 왔어요…. 하여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음에도 참석자들과 대사관 사이에서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

연초 대사관 친한 인사 초청 리셉션에서. 오른쪽부터 나,  Pereira 명예영사님의 따님, Pereira 명예영사님(2010.2월)


행사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총무과 직원이 Dr. Pereira 영사가 어제 Porto에서 오시면서 직원들에게 집에서 담근 빈티지 와인 10병을 가져왔다며, "박 영사님에게는 이것으로 드리랬어요." 하면서 봉투에 담은 와인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와인이 유명한 포르투갈에서는, 우리가 과실주를 담가 먹듯이, 집에서 적당한 병에 와인을 담그고 병에 투박하게 밀봉 연도를 적어놓는데, 영사님이 보내주신 다른 와인을 보니 역시나 집에서 찍은 듯한 2000년도 말고는 특별한 표시가 없는 평범한 와인병에 담긴 것들이었다. 나는 봉투를 뜯지 않고 가져와 주말에 여유 있을 때나 먹어야지... 하고 창고에 두었는데, 이후 주말에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여유가 없어 그런 생각을 깜빡해버렸고, 창고에서 본의 아니게 얼마 더 숙성시켜 버리게 되었다.      


이후, Dr. Pereira 영사는 거동이 불편해질 만큼 병세가 악화하여 전화 연락도 할 수 없게 되었고, 2012년 초 내가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이임한 후 몇 달 있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브라질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와인이 생각나서 창고를 한참 뒤졌고, 결국 와인 봉투를 찾았다. 야…. 받았을 때부터 거의 3년이 됐으니 2000년 밀봉했으면 벌써 13년은 됐겠네…. 하고 열었는데, 와인병에 찍힌 연도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1975년에 밀봉된, 그가 그렇게 말하던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 였던 것이었다. 그 안에는 카드만 한 크기에 작은 편지도 들어있었다.      


'박영사, 내가 자꾸 "나인티인~ 세븐티-파아이브~"하니까 짜증 나죠?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그 해를 까먹는 거 같아 그랬어요. (아내에게도 그런답니다). 요즘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 어쩌면 당신이 내가 명예영사로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영사일 것 같네요. 한국대사관 명예영사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나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그럴 겁니다.     

From. 주포르투갈대한민국대사관 명예영사 Antonio Devesa de Sa Pereira'      


아…. 좀 일찍 꺼내볼 것을…. 

나는 책상에 와인병과 그의 편지를 올려놓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포르투 하면,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소설의 영감을 얻은 도시로 기억하지만,     


나는 Pereira 영사의 1975년을 항상 그리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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